수암칼럼-올림픽 선수들의 화살기도

입력 2004-08-30 14:13:42

60억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막을 내렸다.

신의 땅 아테네 하늘 위에 서른번째의 태극기를 올리면서 우리는 뜨거운 민족의 자긍심과 영광을 맛보았다.

이제 그 영광의 순간들을 뒤로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올림픽 영웅들의 모습 속에 스쳐가듯 인상깊게 기억된 '그림'한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올림픽 선수들의 '화살기도'모습이었다.

'화살기도'.

고요한 교회나 법당에서 제례와 의식에 맞춰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염원을 즉석에서 바치는 기도, 마치 화살하나를 쏘아올리듯 하는 작은 기도를 말한다.

TV에 비친 메달리스트급 선수들의 경기모습 중에서 얼핏 기억되는 화살기도를 바치던 선수들만 꼽아보자. 200m 여자 허들경기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올레나 선수는 스타트전 트랙에 서서 3번의 십자성호를 그었다.

장대 높이뛰기 러시아 여자 선수는 도움닫기 스타트라인에서 장대를 잡고선채 약 3초쯤 기도암송을 했고 육상 200m 예선전에 나선 미국 흑인 선수는 십자가를 입에 문채 레인을 달렸다.

여자높이뛰기의 슬레사랭크(러시아) 선수도 성호를 그은뒤 '바'를 향해 달렸고 100m 허들 경기의 테에스도 선채로 기도했다.

그들 외에도 TV에 잡히지 않은 수많은 선수들의 화살기도 모습은 훨씬 더 많았을지 모른다.

세계 최정상급의 그들이 피나는 노력과 훈련으로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盡人事)를 하고도 대천명(待天命)의 기도를 한 뜻은 무엇일까.

그들의 기도 모습을 승부에 집착한 욕망의 구원이라기보다는 세계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자의 겸허로 보고 싶어진다.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갈고 닦아 온자신감 속에서도 막상 출전의 순간에는 기도를 바친 그 겸허함은 내가 아무리 뛰어난 최고의 선수라 해도 절대자의 섭리에는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과 신의 결정에 순응하리라 인정하며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살기도를 올린 올림픽 선수들의 승리와 패배는 메달의 영광과 함께 또다른 값진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세계 최고라는 영웅의 자리에 오른 젊은 선수들의 화살기도에서 '겸허함'의 작은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면 이번 올림픽도 새벽잠 설치며 관전한 또다른 보람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우리 사회속에서 스스로를 자신만이 최고라는 '영웅'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과연 그들에게 올림픽 선수들같은 화살기도의 겸허함과 신에 대한 경외감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나의 판단 나의 역사관만 정의고 진실이며 상대의 생각과 의견 속에 더 높은 예지와 탁월한 사관(史觀)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깡그리 부정해 버리려는 배타적 독선 속에는 겸허가 있을 리 없다.

지금의 반목과 갈등.분열은 우리사회의 '최고들'사이에 자신위에 존재할 수 있는 또다른 절대적 존재에 대해 겸허히 기도할 줄 아는 올림픽 영웅들의 겸허함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판단, 가치관이 이 시대의 최고 선(善)이며 지고한 가치라는 교만한 '영웅'의식이 모든 화합의 길목을 막고 갈등의 골을 파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떠나 민주국가의 법제도 아래서 이 시대, 우리사회의 기준좌표가 되는 도덕기준, 보편적 가치, 역사관은 소수 대중 영웅들의 편견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주제도하에서 합의된 합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권력자도 서민노동자도 자신의 의견과 사상에 맞지않더라도 합의된 합법적 헌법기관의 심판과 결정에는 겸허히 따라야 한다.

헌재가 '공법인(公法人)의 단체 협약권을 제약하는 게 옳다'고 하면 더 이상 공법인의 종사자들은 반발과 갈등을 끝내야 하고 양심적 병역거부가 위법이라면 어느 누구도 궤변과 억지로 국방의무를 회피하거나 그것을 부추기는 판결을 해서는 안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도 '합헌'이라 판결하고 입법부가 합헌 결정의 의미를 반영해줄 것을 요청했다면 존중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때는 국회결정을 뒤집어준 헌재판결을 존중하고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국보법 판결에는 합헌이라고 판결해도 기어이 국회에서 뜯어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공동체 가치에 대한 겸허함이 없어서다.

이 사회와 나라가 합헌적 민주국가 체제를 지켜가며 제대로 굴러가려면 자칭 최고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올림픽 선수들처럼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겸허함은 부족하고 나만 똑똑하고 말잘하고 톡톡튀며 자기들만 최고라는 이론 밝고 입심 좋은 세력들이 넘쳐나고 있다.

올림픽 폐막식을 보면서 그런 세력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서 스포츠 전쟁은 끝나도 경제전쟁은 매일매일이 올림픽이란 사실이다.김정길(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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