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조선 수신사 김홍집 일행, 일본으로 출발 △1907년 이상설 등 고종 밀사 일행,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 알리는 호소문 제출 △1946년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레아, 비키니 수영복 발표 △1996년 복제양 돌리 탄생 △2001년 박찬호 선수, 한국인 최초로 미국 메이저 리그 올스타에 뽑힘.
그대 가는가/어딜 가는가/그대 등 뒤에/내려깔린 쇠사슬을/마저 손에 들고/어딜 가는가/이끌려 먼저 간/그대 뒤를 따라/사천만 형제가/함께 가야 하는가//아니다.
//억압의 사슬은/두 손으로 뿌리치고/짐승의 철퇴는/두발로 차 버리자/그대 끌려간/그 자리 위에/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연세대 이한열 추모비 뒷면에 새겨진 이한열 유고시 〈부분〉)
1987년 오늘 서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한열군이 숨을 거뒀다.
박종철군 사망 100일을 맞아 6월 10일 예정돼 있던 '고문 치사 은폐 조작 규탄 범 국민대회' 전야제에 참여했다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 맞닥뜨려 시위를 벌이던 중 진압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실려온 지 26일 만이었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다 사망했고, 4월 13일 '호헌 조치'로 인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터진 이 사건은 당시의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이른바 '넥타이부대')을 학생들의 시위에 적극 가담토록 만드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전국에 불어닥친 국민들의 저항을 목격한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지난한 민주화 투쟁에 큰 획을 긋는 순간이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주인공 이한열군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그 며칠 후 결국 눈을 감았다.
7월 9일 이한열군 장례식이 거행된 연세대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서울 시청 앞까지 행진할 때 100만 인파가 연도와 차도를 가득 메웠다고 당시 기록은 말한다.
어느해보다 뜨거웠던 1987년의 여름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는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대한민국은 그를 기억했다.
하지만, 얼마전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던 그의 영정은 누군가에 의해 크게 훼손돼 버렸다.
'시대의 변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이한열이 사랑했던 대한민국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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