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대통령 말의 무게

입력 2004-06-09 09:14:01

"우리 소련이 왜 무너진지 아시오?" 구 소련의 한 장성이 미국 장성에게 물었다.

무기협정을 위한 회담을 끝내고 보드카를 한잔 곁들인 만찬장에서였다.

미국 장성이 군사력의 차이와 소련의 경제난 등을 들어 설명을 해나가자 구 소련 장성은 그 말을 중간에 잘랐다.

"아니오.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 때문이었소. 한마디로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 규정한 그 연설 말이오".

구 소련 장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시 소련은 내가 봐도'악의 제국'이었으니까요".

지난 5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레이건은 1981년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캘빈 쿨리지 대통령(30대)의 초상화를 1층 정면 중앙에 내걸게 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과묵하기로 이름난 그의 처신을 본받자는 뜻에서였다.

실제로 레이건은 꼭 필요한 말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고 실행했다.

그래서 그의 말은 권위가 있고 힘이 있고 소구력이 있다는 정평이 났고 '위대한 전달자(Great Communicator)'라는 칭송까지 들었다.

그가 동베를린에 갔을 때 한 연설 중에 '고르바초프여, 제발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결국 몇 년 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가 한 말의 위력을 실증하는 예로 즐겨 인용되는 대목이다.

이즈음 우리 정가는 6.5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데 대한 원인 분석을 하느라고 분주하다.

4.15 총선에서 압승했던 여당이 불과 51일 동안에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민심의 대역전 현상이 일어났단 말인가. 정계나 언론계가 거론하는 몇 가지 이유 중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것이 대통령의 언행이다.

친여계 언론의 시각도 비슷하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실시된 선거는 이번이 네 번째이다.

첫 번째는 작년 4월 24일 실시된 국회의원 보선 및 지방자치단체장 보선. 당시 노 대통령이 소속한 민주당은 일곱 곳에 후보를 냈으나 전패했다.

두 번째는 작년 10월 30일 실시된 기초단체장 및 지방의원 재·보선. 열린우리당이 창당된 직후에 실시된 선거로 열린우리당은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했고 실적도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난 봄의 4.15 총선이었는데 탄핵 후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대승한 것은 기억에 새롭다.

기억을 좀 더 새롭게 해보자면 그때는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발의되어 있던 때였다.

헌법규정에 의거,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을 대행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 칩거하면서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발언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다만 4월 11일 기자들과 산행 중 감상을 묻는 질문에 "춘래불사춘"이라고 한 일은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노 대통령의 무언(無言)속에 4.15 총선결과는 압승이었다.

6.5 재.보선의 언론 분석대로 대통령의 몇몇 발언이 여당 참패의 일인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야당이라고 해서 이를 즐기거나 고소하게 여길 일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어느 정파의 수장(首長)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권위가 있어야 되고 내외의 존중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과연 그 연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선후책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청와대 비서실은 물론이고 여당의 모든 책임자들, 그리고 국무위원을 비롯한 행정부 고위직들의 지혜와 분발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들에게 미국 대통령의 일화를 한 가지 더 소개한다.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 백악관에 들어갈 때 언론인 출신 한 사람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한 반년이 지나서 아이젠하워가 이 보좌관을 불러 물었다.

"이제 여기 일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텐데 내가 참고할 말이 있다면 들려주시게".

"예, 알겠습니다"하고 돌아간 그는 다음날 무엇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와서 대통령에게 드렸다.

종이에는 단지 'well'이라 쓰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말씀 한 마디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너무나 쉽게 '예스'나 '노'라고 하십니다.

앞으로 누군가가 무슨 일에 대해 물으면 먼저 well(글쎄요)이라고 해놓고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 말씀을 하십시오".

최재욱 전 환경부장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