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한집 건너면 주유소일 정도로 도로변에 널린 것이 주요소다.
갈수록 오르는 것이 기름값이지만 그런데도 주유소는 늘어만 간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가슴졸이며 기름을 넣어야하는 서민들, 특히 화물차 운전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3일 오전 8시 30분 포항시 호동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에서 직영하는 공단주유소를 찾았다.
사전에 도움을 청해 두었다.
박재호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주유원 일이 보기보다 쉽지 않을텐데…".
안대관 과장이 슬쩍 겁을 준다.
보기에도 말라깽이 같은 사람이 괜히 체험한답시고 일에 방해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이다.
15년 전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주유소에서 주유원 생활을 1년가량 한 경험을 말하려다 말았다.
그 당시와 주유기계와 환경 등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경험이 있어 선무당이 사람잡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자만심(?)도 있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박상원 대리로부터 8가지 서비스 항목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영업모토인 정품, 정량, 정직을 강조했다.
그래도 가장 귀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나 넣어 드릴까요?"였다.
실제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전 9시 현장 투입 시간이다.
주유원 선임인 성을선(39.여), 이숙희(37.여) 두 선배가 환한 얼굴로 맞아준다.
매끈하게 빠진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주유기 앞에 멈춰섰다.
"어서오십시오. 얼마나 넣어 드릴까요?" 녹음기를 틀 듯 좀전에 배운 말이 의외로 술술 입밖으로 나온다.
"만땅". 손님의 '만땅'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총을 연료통으로 집어넣었다.
운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만땅'이라는 용어는 사실 '만(滿) 탱크(tank)'의 한국식 용어다.
'탱크에 가득 넣어달라'는 뜻인 셈이다.
주로 나이 든 운전자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풀(full)' 또는 '가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승용차가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대형 화물차가 들어왔다.
화물차는 연료통이 크기 때문에 기름 넣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엔진 소음과 매연도 대단하다.
대부분 화물차 운전자들은 주유시 시동을 끄지 않아 주유원들이 배기가스를 강제로 흡입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차량열과 배기가스까지 마시고 있자니 정말 고역이다.
"아무리 시동을 꺼달라고 해도 운전자들이 잘 안들어요. 시동을 끄면 다시 거는데 불편하다면서…".
성을선 선배가 고충을 토로한다.
공단을 끼고 있는 특성상 이 곳에는 유달리 화물차 고객이 많다.
10대 중 7대꼴로 화물차다.
운전자들도 각양각색이다.
주유후 기름이 조금 묻어 있다는 이유로 괜히 트집을 잡고 욕을 하는 운전자, 앞유리를 닦아주는데도 오히려 더 더러워진다며 기겁을 하는 운전자, 깜빡 잊고 지갑을 두고 왔다는 운전자 등등 천태만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차들이 빠져나가고 잠시 틈이 생겨 두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 학원비도 보태고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일을 시작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까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선배의 일치된 말이다.
"남편의 직장생활을 이해하게 되고 아이들도 일하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줘 일을 해도 힘든 줄 몰라요".
두 선배는 정말 일을 즐기는 것 같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움이 고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돼 이곳을 찾는 운전자들로부터 인기가 많다고 안 과장이 귀띔해 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차량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주유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실수가 발생했다.
주유후 주유기 안전장치를 풀지 않고 그대로 꽂아 버렸다.
만약 모르고 그 상태로 다음 차량에 주유하기 위해 주유기를 뽑게 되면 기름이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초보자의 실수를 눈치챈 이숙희 선배가 재빨리 달려와 조치를 취해 위기를 넘겼다.
그 다음부턴 안전장치 확인을 몇차례나 거듭한 후 주유기를 꽂았다.
또 잔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수차례 주유기를 털었다.
이 모습을 본 성을선 선배가 "어지간히 털어요"라고 말해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그래도 근무환경이 좋은 편이다.
15년 전 일할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주유기 센서도 없고 주유시 가격과 리터 입력시스템도 되지않았다.
주유할 때마다 일일이 주유기와 연료통을 눈으로 확인하며 넘치는지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한번은 주유총이 터져 경유를 뒤집어쓴 경우도 있었다.
목욕탕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주유소 화장실에서 겨우 씻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래도 그 때는 지금처럼 주유소가 많지 않아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수입도 괜찮은 편이었다.
소형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기름을 넣으며 운전자에게 물었다.
"요즘 기름넣기 겁나지 않으세요?"
"말도 마세요. 기름값이 너무 올라 주유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거립니다.
그렇다고 차를 몰지 않을 수도 없고…".
이날의 휘발유 ℓ당 가격은 1천388원, 경유는 911원이었다.
사상 최고였다.
"전에는 가득 넣는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5천원, 1만원씩 주유하는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두 선배가 최근의 주유 흐름을 말해주었다.
그만큼 고유가에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증거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손님들 가운데 자신의 카드가 거래정지된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무더위가 정점을 향해 달릴 무렵 즐거운 식사시간이 됐다.
그러나 주유원들에겐 결코 식사시간이 즐겁지 못하다.
한 숟가락 들려고하면 차량이 그 틈을 놓칠세라 들어온다.
자장면 한 그릇이 금세 두 그릇으로 변한다.
주유하느라 들락거리는 동안 불어서 자연스럽게 양이 늘어나 원하지 않는 두 그릇을 먹게 된다고 했다.
하루 동안 거쳐가는 자동차가 대략 200~300여대. 매연과 뙤약볕 속에서 두 선배의 이마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 구슬땀은 진주처럼 보인다.
그렇게 주유원들은 진주를 달고 살아간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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