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가야-(47)상처난 '역사의 자취'

입력 2004-05-24 08:57:52

일본 도쿄(東京)도 타이토우(台東)구 우에노(上野)공원의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3층 '조선관'. 대가야 양식 금 귀걸이 한 쌍과 F자 모양 말재갈, 경남 산청에서 나온 말안장, 창녕에서 출토된 금동관모(金銅透彫冠帽), 소가야 양식 청동 말띠드리개(銅製五鈴杏葉) 등 한국산 유물 수백 점이 유리 전시장을 장식하고 있다.

또 박물관 수장고에는 금띠와 풀잎 모양 솟은 장식(立飾), 양파 모양(寶珠形) 장식과 달개장식(瓔珞)을 갖춘 고령 출토 금관 등이 '중요문화재'로 보관돼 있다.

일제시대, 대구 남선전기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한반도에서 도굴 또는 수집해간 유물이다.

전(前) 도쿄대 교수 오구라 야쓰이키는 지난 81년 아버지가 모은 유물 1천100여 점을 모두 도쿄박물관에 기증했다.

도쿄박물관에 인접한 도쿄(東京)도 타이토우(台東)구 혼고(本鄕)의 도쿄대박물관에도 대가야권 유물 40여 점을 포함해 수백 점의 한반도 유물이 빽빽이 들어찼다.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에서 나온 목긴 항아리(長頸壺), 경남 진주의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 가야 및 고구려 기와, 신라 토기, 낙랑 토기와 동전 등이다.

이 유물 역시 일제시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 '조선 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이 발굴 또는 수집한 뒤 자국으로 가져간 것이다.

일본왕실의 직속사찰인 나라(奈良)현 동대사(東大寺) 안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에는 현존 최고(最古)의 가야금이 '신라금'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823년 신라에서 왜(倭)로 넘어간 대가야의 악기다.

고령군의 향토사학가 김도윤씨와 김문배씨는 "1940년대 초반 고령경찰서 무덕관에서 오구라가 모아놓은 수t 분량의 유물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 있는 전(傳) 고령출토 금관도 1963년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붙잡힌 도굴범들이 빼낸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대가야의 역사를 방증하는 숱한 유물은 침략자나 도굴범들에 의해 바다건너로, 외지로 산산이 흩어져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대가야 유적과 유물은 잘 보존돼 있을까.

전북 남원시 '두락리 고분군' 1호 무덤은 4번 이상 도굴된 흔적이 나타나고, 바로 옆 직경 30여m의 무덤은 주민들이 내부구조를 훤히 알 정도로 파손돼 있다.

'C'자 모양의 계단식 고분 2기는 봉분이 사라지고 대신 감자와 채소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남원시의 훼손금지 경고판에도 불구하고, 고분 1기는 허리가 잘린 채 개인묘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1천500년 전의 무덤 위에 현대인의 무덤이 함께 자리한 웃지 못할 풍경이다.

이 고분군은 대가야와 백제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기문(己汶)'지역을 근거로 한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대가야의 서쪽 진출 양상을 보여주는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고분군'과 인월면 '건지리 고분군'도 대규모 지배층 무덤이지만,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무덤 주변이 포도밭 등 논밭으로 경작되는 과정에서 봉토가 대부분 깎여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변 산기슭의 '동촌리 고분군'. 400년대 후반, 대가야가 호남 동부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포섭한 토착세력의 지배층 무덤이다.

40여기가 있는 이 고분군은 최근 벌목과 밭 경작으로 무덤 돌이 파헤쳐지는 등 훼손이 심하다.

특히 당국이 이 일대 땅을 매입하지 못한 바람에 땅주인이 무덤 위에 오가피나무를 심어놓았다.

장수 '삼봉리 고분군' 일부 무덤도 봉분 윗 부분에 구멍이 2~3곳씩 뚫려 있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 섬진강 지류 일대에서 나온 대가야 토기의 경우 주민 3~4명이 개별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바람에 분실이나 훼손 우려가 높다.

400년대 후반 이후 대가야에 복속된 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과 함양군 '백천리 고분군' 상당수는 무덤 곳곳에 덮개 돌이 드러날 정도로 도굴에 무방비인 상태다.

대가야와 왜의 정치.문화적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 1호 무덤의 경우 문화재 지정은커녕 고분의 성격을 알리는 표지판도 설치돼 있지 않다.

대가야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유적.유물도 지속적으로 파괴되거나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철의 왕국' 대가야의 최대 야철지로 유력한 경남 합천군 야로면 야로2리 '불묏골'은 지난해 발굴조사 허가도 받지 않은 한 민간단체가 마구 파헤쳤다 말썽이 나자 흙으로 되 덮은 뒤 별다른 사후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대가야 지배층들의 회합의 흔적을 담은 합천군 가야면 구미2리 '가야비'도 별다른 보호장치 없이 도로변에 나뒹굴고 있다.

대가야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기린 신단지는 가야산 기슭 가시덤불에 가려진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경북 성주군 백운동 주민들은 70~80년 전까지 이 거대한 바위 앞에서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를 숭배하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를 올렸다.

방치된 유물뿐 아니라 그나마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조차 관리가 허술한 형편이다.

고령읍 쾌빈리 '우륵 영정각'에는 입구가 자물쇠로 굳게 채워진 채 건립 연대나 영정각의 의미에 대한 어떤 설명도 달아놓지 않았다.

대가야 유일의 벽화무덤인 고령읍 '고아동 벽화고분'(사적 165호)의 경우 입구를 봉쇄해 출입을 제한했지만, 내부 천장과 벽에 습기가 심하게 스며들어 보존대책이 시급하다.

고령읍 장기리 '알터 암각화'(보물 605호)는 투명재질로 만든 지붕으로만 가려놓아 직사광선이나 일반인의 접촉에 노출돼 있고, 고령군 쌍림면 '안화리 암각화'(기념물 92호)는 별다른 보호장치가 없어 훼손이 우려된다.

대가야 유물이 쏟아진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제사유적'과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고분공원'의 안내판에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빠져있다.

500년대 당시 대가야가 뱃길을 뚫으면서 제사를 지냈다거나, 대가야인이 신라에 편입된 뒤 강제로 이주됐다는 관련 내용이 한 글자도 기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유물, 천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고분군, 방치된 유적 유물들. 대가야 역사의 흔적은 이처럼 도굴이나 훼손의 상처가 덧나고 있는데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 : 팻말도 없이 도로변에 방치돼 있는 합천군 가야면 구미2리 '가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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