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순기자의 산골마을 농사일 체험

입력 2004-05-22 08:47:10

초여름을 알리는 빗줄기가 사과나무 잎사귀를 두드린다.

엊그제 봄비와는 달리 이제 제법 굵어졌다.

신록의 오월, 빗줄기도 이제 계절을 닮아 간다.

지난 13일 낙동강 상류인 봉화군 명호면 관창 1리로 향했다.

어렵게 얻은 하루 일감이라서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빽빽이 우거진 굴참나무 사이로 꼬불꼬불 난 산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자 목적지인 '은행잎 토종닭'으로 유명한 갈골마을 민순기(62)씨 집이 나타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기슭 외딴집 '갈골 민가네 농장'. 밤새 비를 뿌린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마을 전체에 신비롭다.

"아이구 어서 오이소. 길이 험하지요? 농사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허허 힘들텐데".

새벽 5시 30분. 빙그레 미소지으며 어설픈 일꾼을 반갑게 맞이한 민씨는 벌써 허리춤에 수건을 차고 마당을 나서는 참이다.

손에는 호미가 들려 있다.

아뿔사, 늦었다.

도착 하자마자 허둥지둥, 농사일보다 채비가 더 바쁘다.

과수원 5천평 등 모두 1만여평의 밭농사를 짓고 있는 민씨의 일손은 부인 강명자(63)씨와 둘째아들 경동(37)씨가 전부다.

그 외는 산넘어 이웃과의 품앗이가 고작. 마침 이날은 셋째인 경걸(33.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씨도 찾아와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밭으로 향하는 새벽 들길 주변은 온갖 이름모를 새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구구 구구구". 어릴적 귀에 익은 산비둘기 소리도 섞여 있어 반갑다.

이슬이 하얗게 맺힌 풀밭에는 발길을 뗄 때마다 놀란 개구리가 펄떡펄떡 달아난다.

"저 개구리가 우리집 토종닭 별식이죠". 셋째아들 경동씨의 설명에 보란 듯이 개구리를 낚아 챈 토종닭 한마리가 냅다 뛴다.

이를 본 닭들이 기를 쓰고 줄이어 따라 간다.

민씨집 앞 풀밭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개구리 쟁탈전. 마치 미식축구를 보는 듯하다.

영락없는 '오월영계'들의 날개 짓에 풀잎 이슬이 후두둑 구슬처럼 떨어진다.

농사용 비닐을 깔고 구멍을 뚫고, 주전자로 물을 주며 각자 한 이랑씩 맡아 고추모를 심는다.

100m 달리기 선수처럼 모두들 능숙한 손놀림으로 앞서 나간다.

"뿌리에 흙을 너무 많이 덮어도 안돼요". 풋내기 농사꾼의 이랑이 뒤처지자 걱정이 된 듯 기웃기웃 거들며 요령도 가르쳐준다.

애써 심는 데도 고추모가 삐뚤삐뚤하다.

일손이 서툰 게 금방 표가 난다.

"밭이 산비탈이라서 경운기를 쓰지 못해요. 그래서 소로 밭을 갈지요".

자갈밭은 농사용 비닐까는 기계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일일이 삽으로 묻고 깐다.

다랑논과 비탈밭 뿐인 산촌. 그래서 농사는 더욱 힘들다.

어릴적 고향집 농사를 거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평생 일만 하시던 아버지….

처음보다 손놀림도 빨라졌다.

20여년만에 다시 해 본 밭일이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이랑을 따라 앉은뱅이 걸음이 한나절쯤 되자 허리가 끊어질듯 아파온다.

땀과 흙먼지가 섞여 온몸이 흙투성이다.

"식혜 먹어 보이소". 대여섯 이랑을 심고 나서야 막걸리를 곁들인 새참이 나왔다.

쑥떡에다 식혜, 애호박 채썰어 넣은 국수도 잔뜩 말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구름을 인 가파른 마을 앞산이 벌떡 일어서 미륵마냥 고추밭을 내리 굽어보고 있다.

점심후 오후엔 개울물을 물지게로 날랐다.

비틀비틀 물지게 질. 잘해 보겠다는 건 생각뿐. 매번 고추밭까지는 절반은 쏟고 반통만 옮겼다.

모든 게 어설픈 일이 우스갯거리만 된 것 같아 민씨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맑디맑은 개울에는 1급수 어종인 버들치가 떼지어 헤엄치고 돌밑마다 가재가 긴수염부터 빠끔히 고개를 내민다.

새벽부터 시작된 고추모 심기는 오후 7시쯤에 끝이 났다.

힘들기도 했지만 한뼘쯤 남은 민씨집 고추밭 이랑을 마무리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기도 했다.

고추심기 일당 만큼은 양성 평등인 모양. 요즘 이 마을에선 남녀 공히 하루 일당이 3만원이란다.

저 멀리 도립공원 청량산 정상이 산골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마치 갓을 엎어 놓은 듯하다.

청량산 정상이 눈아래로 보인다니…. 개울물로 대충 흙먼지를 털고 돌아오는 길 갈골 민씨의 외딴 집 어귀에 금세 어둠이 깔렸다.

"요즘같은 농사철에는 줄 게 없어 큰일 났네요. 오늘 고생 너무 많이 했는데…"라며 언제 따뒀는지 산두릅 한움큼을 내미는 민씨의 부인은 건너편 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기 앞산에 굵직한 다래가 참 많아요. 휴가철에 놀러오면 내가 한 광주리를 따드릴게" 하고는 얼굴에 정겨운 미소를 지었다.

봉화.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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