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반성문'인들 어떠리

입력 2004-05-17 13:46:47

어린시절 웬만큼 모범생이 아니고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거나 벌을 선뒤 '다음부터는 더 잘 하겠다'는 반성문을 쓰곤했던 추억들을 누구나 갖고 있다.

퇴학을 당할만한 짓을 했어도 정학 정도로 처벌을 낮춰 한번더 학업의 기회를 주거나 정학시킬 정도의 잘못에 화장실 청소 정도로 벌을 낮춰 줄때도 대부분 경우 용서 대신 꼭꼭 반성문으로 자아변화의 각오를 다짐케 했던 기억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벌 선 뒤의 반성문은 공자말씀이나 성경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바르고 옳은 말만 골라골라 써졌고 반성문 대로만 하면 꼴통개구쟁이가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될것같을 정도로 비장하고 진지했다.

엊그제 탄핵기각과 함께 직무에 복귀하면서 발표한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문은 취임 후의 이런저런 숱한 담화글 중 가장 비장하고도 진지한 그리고 옳고 바른 말만 골라골라 쓴 담화였던것 같다.

과거의 거친 화법이나 어휘와는 달리 절제되면서도 적절히 걸러지고 다듬어진 어법으로 솔직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담아 낸 느낌이다.

사색과 은둔의 여유는 때로는 사람의 사고(思考)의 폭과 깊이를 바꾸는가 보다.

탄핵 소추 상태속의 두달간의 은둔이 자아변화의 심기를 다지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 담화문은 문맥대로라면 이제 제대로 된 믿음직한 지도자가 나타나는게 아니냐 싶을만한 내용이었다.

거기다 헌법재판소의 기각결정 주문(主文)에 덧붙여진 몇가지 문안을 짚어보면 '큰 벌은 세우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런저런 것은 더 잘 해야 할 것'이란 반성(反省)점을 충고하고 있는만큼 비록 형식은 담화문이지만 실은 '반성문'의 성격을 띠고도 있다.

실제 이번 담화문 속에는 상당부분 '사죄', '자신의 허물', '도의적 책임' 같은 솔직하고도 반성의 의미를 띤 낱말들이 많이 들어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담화문을 반성문이란 이미지나 표현으로 거론하는 것이 못마땅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탄핵정국 이후의 첫 담화문 만큼은 국민들에게 담화문보다는 반성문 같은 다짐으로 들려지는 것이 지도자와 국민간의 가슴과 가슴을 더 잘 통하게 할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노 대통령의 담화문을 딱딱한 통치자의 정치선언으로가 아니라 '앞으로는 더 잘 하겠습니다'는 어린시절에 썼던 반성문처럼 받아들여보자.

그것이 그분의 새로운 다짐, 약속, 각오를 더 진솔하게, 더 인간적으로 믿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헌재(憲裁)와 국민여론이 탄핵기각이란 결정을 내린 속뜻에는 그분이 이제는 정말 변화된 리더십으로 더 잘하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해달라는 기대와 주문이 담겨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이번 담화만큼은 세월이 가면서 또다시 정쟁(政爭)에 휘말려 뒤집어지고 굴절되는 정치적 거짓 선언이 돼서는 안된다.

국민과 야당까지도 그분의 '믿어주십시오'라는 반성문을 받아들고 그의 정직성에만 매달릴게 아니라 상생(相生)의 마음으로 믿어주고 밀어줘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노 대통령 또한 이번 담화문이 스스로 반성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겸허함과 비운 마음을 가져야만 진정으로 변화된 리더십을 보여줄수 있을 것이다.

신발끈을 동여매고 열심히 뛰겠다'고 다짐하셨는데 채근담에는 '어제 맨 신발끈도 오늘은 느슨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

나날이 다시 끈을 여미어야 하듯 사람도 그가 결심한 일은 나날이 거듭 여미어야 변하지 않는다'고 깨우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마르틴 루터의 반성에 관한 충고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우리가 매일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이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 청소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마음속에 있는것은 아니다.

어제 가진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노 대통령의 솔직, 진지한 각오와 반성도 늘 새롭게 여며지고 다듬어 가지기를 바라고 싶다.

이번 담화가 헌재의 충고와 지적대로 또 부적절한 헛말처럼 돼버리는 날에는 이제 그 분에게는 더이상 그 어떤 권위 회복의 기회도 오지 않게된다.

이번 담화문, 아니 '반성문'은 일단 마음에 든다.

그리고 잘 지켜질것도 같다.

믿어보자.김정필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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