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여성주의자, 노자

입력 2004-05-06 11:49:57

어머니는 딸을 여섯이나 내리 낳으시고서야 장남인 나를 낳으셨다.

그래서 나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남자들보다는 여자들 가운데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편안하고 유쾌하다.

여성들은 많은 덕성을 갖고 있다.

여성들은 섬세하고 경쟁을 좋아하지 않으며, 잘못을 쉽게 용서한다.

여성들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길러준다.

여성들은 부드러우며 약한 것에 대한 연민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다.

노자(老子) 역시 부드럽게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역설하였다.

춘추전국 시대의 한 가운데를 살았던 그는 여성적인 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어린 아이가 어른보다, 골짜기가 봉우리보다, 비어있는 것이 차있는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보다,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도에 가깝다고 말하였다.

그는 인류 최초의 진정한 여성주의자였다.

이런 취향의 유사점 때문인지, 나는 노자를 좋아한다.

'도덕경'의 구절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준다.

특히 오랜 시간강사 시절 동안, 내 마음이 상처받았을 때마다 노자는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회학도인 나는 '도덕경'이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듯이, 현대문명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 사상은 현대문명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약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거칠다.

우리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는 현대라는 전쟁터를 살아가야만 한다.

싸움은 수많은 패잔병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야 하는 현대적인 삶의 구조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더욱 강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노자는 우리에게 더욱 약해지라고 말한다.

노자는 싸움이 남긴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람들의 거칠어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여성적인 부드러움뿐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여성적인 것은 아름답고 영원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여성성은 심하게 억압받고 있다.

며칠 전에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를 보았다.

가슴 뭉클한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보니 같이 갔던 사람들도 모두 울어서 눈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사내답지 못하다'는 핀잔으로 남성들의 눈물을 억압한다.

여성들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은 더 심한 것 같다.

현대사회에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두드러진다.

나는 이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하며, 그간의 부당한 남녀간의 성차별을 해소시키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의 약진이 여성성의 확산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경쟁사회에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투쟁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여성 해방은 빈번히 여성의 남성화와 동일시되면서, 여성성을 억압하고 남성적인 현대문명의 문제를 고착화시키는 것 같다.

이런 현재의 상황을 돌아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나는 현대를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변화는 여성성의 확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여성은 더욱 여성다워지고 남성도 자신 안에 있는 여성스러운 덕성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가 아닐까싶다.

단죄보다는 용서가, 투쟁보다는 포용이,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증오보다는 사랑이, 오만보다는 겸손이 우리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여성주의자 노자가 전해주는 이런 지혜를 우리 시대가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과 문명에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홍승표(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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