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칡과 등나무의 이념논쟁

입력 2004-05-03 13:57:10

벌써 5월이다.

지난주 초쯤만 해도 여치 속날개 색깔같던 여리고 고운 새잎들이 어느새 봄비 몇번 맞더니 짙푸른 초여름 숲으로 바뀌었다.

휴일 오후 숲길을 걸으며 나무등걸을 감고 올라가는 칡넝쿨을 본다.

그리고 산자락 아파트 어귀에서는 등나무를 본다.

칡과 등나무를 보면서 문득 '갈등(葛藤)'이란 낱말과 함께 느닷없이 불붙고 있는 여.야 정치권의 이념논쟁이 떠오른다.

칡(葛)은 나무를 감고 올라갈때 왼쪽으로 감고 등(藤)나무는 오른쪽 방향으로 감고 올라간다.

그래서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면 불화와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에서 '갈등'이란 말이 연유한다고도 말한다.

며칠전부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당선자 워커숍과 연찬회 등의 모임에서 입을 맞춘듯이 당의 이념과 정체성, 보수와 진보의 노선에 대한 논쟁을 불붙이고 있다.

보수 정당의 정체성이 강했던 한나라당 안에서 느닷없이 '좌향좌' 주장이 나오고 개혁진보의 정체성을 지녔던 열린우리당에서는 의장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경계를 허무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면서 여야 당내부의 이념논쟁 갈등이 일고 있지만 솔직히 대다수 국민들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와 두 이념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잣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칡넝쿨과 등나무처럼 여당이 왼쪽으로 돌아가면 국민생활이 같이 왼쪽으로 감기고 야당이 오른쪽으로 감아올라가면 외교나 경제가 오른쪽으로 함께 휘감겨 갈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선거직후 느닷없는 보수.진보.좌파우파의 이념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는 현상은 이제 막 뽑은 새 국회는 뭔가 새로운 정치력을 보여주려니 하고 목을 빼고 있는 국민들에게는 웬 이념갈등이냐는 불안과 실망을 갖게 한다.

정치권이 나눈 좌파우파, 보수, 진보의 개념과 기준은 어떤것인가. 좌파와 우파의 시작은 프랑스 시민혁명을 주민공회때 의장의 자리를 기준으로 오른쪽 자리에 온건보수 성향의 지롱드당(黨)이 위치하고 왼쪽에는 좌파적 진보성향의 자코뱅당이 자리한데서 부터 비롯됐다고 해석하고 있다.

진보는 과거의 안정, 고착을 깨부수는 의미가 강해 좌파의 성향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보수 또한 안정유지란 좋은 의미도 있으나 기존 권력집단의 자기방어적이고 변화를 억누르는 성향을 갖기도 한다.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사상의 좌파는 사회를 불안하게 할수도 있고 이러한 비판에서 중도좌파내지 중도진보라는 완충적 성향이 등장했다.

새로운 변화, 다양한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성향의 보수도 어느 정도의 변화와 개혁을 수용하는 중도보수의 성향을 표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17대 여.야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이념 성향조사에서 진보정당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여당의원의 56%가 중도진보를 표방했고 28는 '중도' 를 선언했다.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 역시 62%가 보수아닌 중도보수라 밝혔고 24%는 중도임을 시인, 86%가 전통보수당의 정체성에 변화가 왔음을 드러냈다.

중도지향의 이념논쟁을 좋게보면 국민이 바라는 이념이 안정속의 새로운 변화라는 '중도'쪽에 있음을 정치권이 잘 읽어내고 민심과 호흡을 맞춰나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지난선거에서 드러난 민심과 표의 성향에만 매달려 자신들의 기존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내던진채 눈치보기와 대중 영합에 쏠렸다는 의혹도 없지않다.

양쪽다리걸치듯 겉포장된 중도 이념의 안전지대에 숨는 또 다른 낡은 정치를 되풀이 하는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바뀐 국회가 새로운 정치이념을 재정립하고 나아가보자는데 대해서는 굳이 말릴 것 없다.

문제는 과연 전세계 자유민주 경제체제 국가에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낡은 이념 논쟁이 명색 2만달러 달성을 꿈꾸는 국가의 물갈이됐다는 새 정치권이 갈등을 겪어가며 매달려야 할 시급한 어젠다 인가 하는 점이다.

외화를 벌고 취직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는 경제 5단체장들이나 국가의 녹슨곳 썩은 곳을 깊이 알고 있는 감사원장 같은 인사들은 한결같이 '지금이 이념논쟁이나 하고 있을때인가'며 국가경쟁력 강화와 민생을 호소하고 있다.

칡과 등나무처럼 정치권은 이념논쟁쪽으로 감고 올라가고 경제인과 지식인.관료들은 경제회생 쪽으로 감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게된 또다른 '갈등'은 아닐지 짚어봐야 한다.

지금은 모든 국민적 역량과 정치력.노동권 등이 국력재건 이라는 한방향으로 튼튼한 줄기가 돼 감아 올라가는 국민통합이 이념의 논쟁보다 더 중요한 때다.

갈등은 충돌과 엇꼬임의 낭비로 공멸을 낳을 뿐이다.

김정길(명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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