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30분.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으로 교육방송 고급 강의를 들어야 한다.
저녁에 학교에서도 2시간이나 중급 TV 강의를 들었는데…'.
어쨌든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당장 6월 모의고사에, 수능시험까지 여기서 출제된다니. 그래도 TV나 컴퓨터로 듣는 건 잘 와닿지 않는다.
어떤 강의는 느슨하다.
눈에 힘을 주자. 오늘도 졸지 말자고 몇 번이나 외쳐야 강의가 끝날 것인가.
흔히 들리는 고3생의 요즘 일기다.
EBS 수능강의 시작 2주째. 수험생들의 일과표는 벌써 수능강의에 맞춰졌다.
EBS 조사 결과 고교생의 74.6%가 수능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인터넷 전용 사이트 EBSi는 연일 가입 회원이 늘어나 벌써 50만명을 돌파했다.
교육부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은 성공으로 가는 중일까. 교육계에서는 6월 모의고사에 수능강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성공으로 가는 '출제'라는 키워드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란 예측이 많다.
이는 교육부 스스로 학업 성취를 판별하는 기준을 점수에 두는 현실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교육, 성적표에 매달려 교사-학생의 상호작용을 통해 교실 수업이 줄 수 있는 참된 성취를 무시하는 교육을 교육부가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수능강의는 과정이 불손하다.
일년여를 준비해왔다면서 인프라 구축에 허둥대고, 필요한 예산은 이곳저곳에서 마구 당겨 메꿨다.
강의 교재는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나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재가 학생들 사이에 이미 교과서보다 더 중요한 수능 바이블이 됐다.
'출제'라는 위험한 무기를 수시로 들먹인 때문이다.
교육부가 이러니 학생들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에 젖고 있다.
한두 번 들어본 뒤의 조사에서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될 거라고 대답한 학생이 무려 88%나 되면서,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한 학생이 12%에 불과한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사교육을 막기 위해 정부 주도의 사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EBS 수능강의는 잘못된 게 아니다.
하지만 졸속은 곤란하다.
'없는 길도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가면 길이 된다'는 식은 용납될 수 없다.
잠 못 들며, 결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학생들의 고통을 담보로 한 성공은 절대로 정당할 수 없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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