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7)-청화산(3)

입력 2004-04-07 11:34:05

3.

이현섭 선배가 사는 청화원은 백두대간 지능선의 산중턱에 넓지막하게 터를 내어서 집한채 외롭게 덩그러니 자궁처럼 들어 앉아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폭 에워싸여 있는 최고의 보금자리. 무릉도원이 따로 있나. 이곳이 무릉도원이지. 약 8년전에 속리산 주위를 살펴보다가 이곳이 명당자리라서 그냥 눌러 앉았다고 한다.

산밑 마을에서 산중턱 집까지 난 산길은 혼자서 포크레인으로 닦았고 전신주까지 개인비용으로 끌여들여 전기를 공급받는다고 한다.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구만요.

'궁기리'라는 명칭은 활터의 한자말로 예전, 이 근처에서 태어난 후백제 창업주인 견훤이 바로 이 산자락을 넘나들며 활을 배우고 무예를 익혔다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뒤에 해방후 북한에서 월남한 10여 가구가 명당자리라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 모두 떠나고 청화도사가 그 자리를 더 잘 닦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청화도사님. 백두대간의 맑고 깨끗하고 깊은 정기를 혼자서 오롯이 받고 있구만. 욕심도 많으시네. 너무 하시네. 20년후에는 이런 지역의 집값이 강남지역의 집값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뛰어오르겠구만. 세금을 많이 내셔야하는데, 국가에서 아직 이런 '기 개념'이 별로 없어서. 천하디 천한 '물질 개념'만 갖고 있어서. 하기사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장땡이지 뭐.

좋은 곳에 살면 뭐해. 사유가 자유로워야지. 칸트는 평생 자기 고향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지만 사유의 세계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자재로 움직였죠. 칸트는 바보구만. 넘어가고. 홍길동의 작자인 허균도 자신보다 수준 높은 공자나 맹자, 성현들을 아무런 비용도 없이 친하게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죠. 이헌태도 마찬가지죠. 요즘 책을 많이 접하다보니 공자도 내 친구같고 맹자도 내 친구같고 허균도 내 친구같고. 너무 좋아요. 착각은 자유라구요. 그런 착각은 좋은 것이죠. 누추한 방안에서 그 높고 높은 성현들과 정신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너무나 멋지죠. 우주의 품안에서 시간을 초월해서. 너무 멋진 허균. 너무 멋진 이헌태.

10년전만해도 젊은 사람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 파처럼 묻혀서, 그게 아니고 땅파서 묻혀서 즉 파묻혀서 살면 뭔가 이상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너무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 너무 부러워한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은데 자식들 대학마칠 때까지는 그래도 버텨야지 뭐. 낭만파 거두, 이현섭 선배 부럽다 부러워.

이날 주인장 선배 사모님이 서울로 급히 올라가시고 구미에 사시는 후배되시는 신혼부부 한쌍이 집을 지키고 있었단다. 닭과 개의 먹이는 주어야 하니까. 이 얼마나 생명존중 사상인가. 아니면 말고. 이 집 주인장도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 서울에 볼 일 보러 갔다가 부랴부랴 급히 내려왔단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가니 넓게 트인 공간에 각종 과실주들이 큰 항아리안에 그득 그득 들어있고. 역시 술꾼들 눈에는 술이 제일 먼저 들어오죠. 또 국궁과 각종 악기들이 한켠에 놓여있고 벽에는 선종을 일구신 달마거사 의 얼굴이 그려진 중국 진품 탁본도 눈에 띤다. TV에도 여러번 출연하셨는 지 방송장면사진들도 내걸려있다. 인간답게 사시는 구만.

무예와 기수련에는 유명한 분이신 것같았다. 그 와중에 국궁도 배우고 기타고 배우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찾아 오면 눈동냥 귀동냥 손동냥을 하신다고. 앞 마당에 조랑말도 있었는데 지금은 내다 팔았다고 한다. 하여튼 참 대단하신 분이구만.

청화원에 미리 도착한 백신종선배는 온 집안 뒤져 '나물잔치'로 한 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길다란 나무상에는 역시 촌김치가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땅에 묻힌 장독에서 꺼낸 김장김치, 그 맛이 일품이었죠. 주인장에 따르면 이번 겨울에는 5백포기 배추김치를 했다고 하네요. 이런 주인장이라면 한번 다녀간 객은 또 오겠어. 이런 것을 두고 인간이 싫다는 거요 인간이 좋다는 거요. 저 김치, 몰래 도둑질해야 하는데. '김치도둑'은 들켜도 봐주겠지뭐.

도둑 가운데 아름다운 도둑도 있죠. 조선시대 날렸던 임꺽정과 일지매. 그 놈들이 훔친 물건을 좋은 곳에 쓰든 말든 도둑은 어차피 도둑. 다만 '꽃씨 도둑'은 아름다운 도둑이죠.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하게 사신 피천득 시인의 '꽃씨와 도둑'. "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꽃이란 말이 나오니 또 봄이 그리워진다. 빨리 봄이 안 오나.

보너스. 피천득선생은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서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정답입니다.그런데 실천이 잘 되지 않아서.

내가 태어난 조국 강토는 어찌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순환하는가. 왜, 무슨 이유로, 무엇 땀시. 얼마나 큰 복인가. 생. 로. 병. 사도 네 가지네. 운명을 가늠하는 몇월몇일몇시몇분 태생의 사주도 네 가지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네 가지는 뭐니 뭐니 해도 이헌태, 유영주, 이원교, 이승은 네 명이죠. 누굴까. 맞춰보세요. 다만 한국에서 예외로 사는 한문 '죽을 사'자를 의식해서 썸찍한 수로 되어있죠. 그래서 엘리베이트에서도 4층을 F층으로 한다나.

상위의 '나물 잔치'. 떨깻잎, 순무, 산채같은 나물이 술안주로 잔뜩 펼쳐져있다. 이어 구수한 냄새가 나는 시골의 하얀 살밥이 나왔다. 저녁 10시 반이 다 되어가니 배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후 모습은 상상이 갈 것입니다.

다들 허기가 지다보니 부엌 한 켠에서 끓고 있는 촌 도야지고개를 숭숭 쓸어 넣은 맛있는 김치찌개가 나오기 전인데도 걸신걸린 것 처럼 밥그릇을 다 비우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그래도 꿀맛이다. '김장김치'가 곁반찬이 아니고 중심반찬이 되었구나. 예전에는 김치하나로 밥먹었는데 지금은 말도 안되죠.

신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신이 '걸신'이라고 하네요. 어찌되었든 '밥은 생명'. 양승준 시인의 '밥은 곧 왕이다'. " 하루 세 번 / 한 끼도 거름 없이 / 너를 향해 머리 조아리는 / 이 거룩한 시간 // 밥은 곧 왕이다" . 니들은 다 내 밥이야. 잉. 밥도 안좋게 쓰일 수가 있네. 밥이 법이고 법이 밥이라는 시도 있던데.

시골 김치찌개가 어찌나 맛있는 지 나는 밥을 한 그릇 더 먹었다. 배터져 죽어도 괜찮다는 결단에 의해. 식성 좋구만. 식(食)과 성(性)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그래서 둘다 '먹는다'는 표현을 하나. 뭐야. 여기서 식과 성의 식성과 식성 좋다고 할 때의 식성과 다르다고요. 알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배터지게 먹고 난 뒤 다시 무자비하게 다이어트하는 게 정답. 그런데 문제는 다이어트를 한 적이 없기때문에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은 당연. 역시 주의사항. 제가 경험해 보니 자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예상대로 밥판, 술판이 동시에 벌어졌다. 첫 대면인 나그네 객들이 주인행세하면서 거실 큰 항아리에 놓여 있는 복분자술(오강을 깰 정도의 정력주), 향내나는 더덕주, 인삼술등 보이는 대로 마구 꺼내 마셨다.

물론 주인의 허락하에. 사실 허락은 무슨 허락. 허락하지 않으면 어떡하실 건데. 이방에 있는 객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헌태의 구호, '뭉치면 힘, 흩어지면 돈'. 요즘 불경기에는 웬만하면 퇴근후 바로 집으로 찢어 집시다. 그게 다 돈 버는 겁니다.

청화원 주인방은 천사인지 얼굴을 한 번도 붉히지 않고 "한 번을 봐도 십 년을 사귄 친구같다"며 웃기만 한다. 자기 집인양 닥치는대로 꺼내 마시고 떠들고 하는 무례한 객(客)들 반성하시요.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청화도사는 이 시대에는 찾기 어려운 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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