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5)실패로 끝난 정치개혁

입력 2004-04-07 09:11:31

---공존에서 독존으로

권력투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권력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투쟁이다.

전자는 부정적이지만 후자는 긍정적이다.

예송논쟁으로 촉발된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쟁은 전자에 가깝다.

명분은 액세서리에 불과했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싸웠다.

효종의 국상 때 송시열이 1년복설을 제기한 것이 왕권에 손상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그의 예학 학설이었지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 3년(1677) 채제윤(蔡悌胤) 등 남인계열 유생들이 송시열의 죄를 고묘(告廟:종묘에 고함)하자고 주장한 것은 그를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고묘는 강행되었고, 남인들은 그 여세를 몰아 판중추 민정중과 민유중, 이숙 등의 서인 중진들을 모두 유배보냈다.

송시열의 1년복설은 서인축출을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차지하자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정치가 횡행했다.

경신환국 7일만에 서인 거물 김석주는 정원로를 사주해 남인 영수 허적과 그 아들 허견, 그리고 복선군을 역모로 몰아 제거했고, 윤휴도 사형당했다.

역모라는 것은 남인 제거를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숙종 8년(1682)에는 고변이 잇따라 임술고변이라고 불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전 병사 김환(金煥)이 남인 허새(許璽).허영(許瑛)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하자마자 이틀 후에는 김중하(金重夏)가 다시 남인 영수 민암(閔墨音)을 역모로 고변했고, 나흘 후에는 김석주의 심복 김익훈이 궐내 장신들의 숙직소인 아방(兒房)에서 숙종에게 고변했다.

이는 모두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척신 김석주와 김익훈의 시나리오였다.

가혹한 고문에 못 이긴 허새와 허영은 거짓자백한뒤 사형당했고, 김환은 자헌대부를 제수받았다.

---공작정치에 대한 반발

그러나 김석주가 김환을 허새의 옆집으로 이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작정치라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러자 서인 소장파인 승지 조지겸(趙持謙), 사헌부 지평 유득일, 사간원 정언 유명일 등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 김익훈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좌의정 민정중, 우의정 김석주 등 서인 노장파는 김익훈을 옹호했다.

이는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리는 시발점이 되었는데, 남인제거라는 서인의 절대당론에 젊은 서인(소론)들이 부당성을 지적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더 이상의 소모적인 정쟁은 중단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숙종은 사대부들의 인망을 얻고 있던 송시열,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을 출사시켜 파문을 잠재우려 했다.

이때만 해도 송시열은 강직한 성품으로 서인 소장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조지겸은 송시열을 여주까지 마중가서 "김익훈이 김환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허새와 허영을 꾀어 역모로 죽게 하였으니 그 자신이 반역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라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그런 자는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송시열은 서인 노장파의 설명을 듣고 태도가 달라졌다.

오히려 그는 김익훈이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며, "신에게는 실지로 형제의 의리가 있습니다"라고 김익훈을 옹호했다.

당론을 뛰어넘지 못하는 송시열에 대한 젊은 사류들의 실망은 컸다.

---화해의 정치를 주창하는 윤증

그래서 이들은 윤증을 주목했다.

숙종 9년(1683) 5월 고향 논산을 떠난 윤증이 과천에 머물며 서울로 들어오지 않자 먼저 출사해 있던 박세채가 찾아갔는데, 그에게 윤증은 세 조건을 제시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의 원한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세 외척, 김만기.김석주·민정중)의 위병(威柄)을 막을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숙종실록' 9년 5월 5일)'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연려실기술'에는 윤증이 "이 세 가지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나는 들어갈 길이 없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윤증의 요구는 서인 소장파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정치공작 담당자들을 처벌해 남인들의 원한을 풀고, 부당하게 정사에 관여하는 김석주같은 외척을 축출하고 정상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옹의 세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연려실기술'은 '강상문답'을 인용해 "지금 세태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배척하고 순종하면 두둔하는데 이런 풍습을 제거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데, 형이 그것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고 조금 달리 적고 있는데 이는 다른 당파 사람들도 등용해서 함께 국정을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노론의 비판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 "명재(明齋:윤증)가 이 세가지의 일로써 현석(玄石:박세채)에게 조건을 삼은 것은 어느 것이나 바꿀 수 없는 의논이었다.

… 명재가 말한 세 가지 일이 그른 것이라고 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 말을 어디서 들었다는 것을 논할 것이냐"라고 옹호한 것처럼 이것은 당론을 뛰어넘어 가장 시급했던 정치개혁안이었다.

---정치 참여 거부하고 낙향

그러나 이는 숙종의 큰 결심이 있으면 모를까 박세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박세채가 "할 수 없다"고 대답하자 윤증은 사직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연려실기술'은 윤증이 "시열을 따른다면 장차 큰 화가 있으리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불과 5년 후에 다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기사환국)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해 송시열과 김수항 등 수많은 서인 노장파가 사형당했다.

윤증과 소론의 주장대로 공작정치를 주도한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 등을 처벌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했다면 송시열은 팔순의 나이에 사약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공존(共存)이란 정치개혁을 거부하고 독존(獨存)을 추구한 결과 그 자신까지 불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한에 쌓인 각 당파는 극단적인 독존을 추구했고, 이는 조선 사회를 질곡으로 몰고갔다.

갑술환국(숙종 20년)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송시열의 제자들은 남인들을 제거한 후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노론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압살당했다.

조선 사상사에는 외주내왕(外主內王), 혹은 양주음왕(陽主陰王)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는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가 낳은 특수한 용어였다.

겉으로는 주자학자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인데, 주자학자를 표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시대의 반영이었다.

이광사(李匡師)·이긍익(李肯翊) 같은 인물들이 그들인데, 윤증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윤증의 제자였는데 윤증은 숙종 25년(1699) 정제두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전의 사우(師友)들과 함께 보았던 양명학 서적들을 지금은 버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라고 적어 자신도 양명학을 공부했음을 밝혔다.

정제두는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에 은거해 조선 양명학파인 강화학파를 형성시키는데 섬이 아니면 다른 사상을 연구할 수 없었던 닫힌 시대의 반영이었다.

이 무렵 서양은 초기 자본주의라 불리는 상업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중상주의 정책과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나아가 18세기에 들어서면 시민층이 성장하면서 시민혁명이 발생해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극단적 정쟁의 결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가 수립되는 등 세계사의 흐름과는 거꾸로 갔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산업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2000년도에 152억1천700만 달러에 달하던 외국인 직접투자 비율은 2003년에는 64억6천700만 달러로 급감한 반면 국내 산업의 해외 이주는 러시라고 부를 만큼 급증하고 있다.

당연히 일자리는 급감해 '이태백'이란 말이 자연스럽고, 경기도 평택에서는 15세 소녀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와 중동 지역만 이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정쟁과 분열로 지새우고 있다.

나라는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는데도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도 정치인이라도 된양 둘로 갈려 싸우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의 이념과잉은 극단적 권력투쟁의 부산물일 뿐이다.

당론을 뛰어넘어 공작정치 수행자의 처벌과 반대당에 대한 화해를 통해 새시대로 가자고 주장했던 소론과 윤증의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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