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민들레처럼

입력 2004-03-30 09:06:56

지인이 보내온 e 메일에 '…세상은 시끄러워도 봄은 찾아오니까 고맙지요?'라고 쓰여져 있다.

한낮은 늦봄이라 할만큼 푸근한 요즘, 눈길 가는 곳마다 알록달록해져서 '아이쿠, 벌써!'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온 거리가, 산이, 들이 환해지고 있는데 유독 우리네 얼굴은 비오기전 흐린 하늘빛처럼 어둑신하다.

하긴 즐거울 일이 별반 없는 요즘이다.

10만원을 깨도 손가락새 모래 빠져나가듯 하여 장바구니 들기가 겁나고, 청년실업은 탈출구가 보이질 않고, 엽기소설에서나 있음직한 해괴한 사건들은 그치질 않으니 웃을 일이 뭐 있을까. 게다가 온 국민이 정치라는 파도에 휩쓸려 어질어질 멀미를 앓는데다 지역색의 피멍 위에 진보·보수 갈등이니 세대차 갈등 따위로 민심마저 사분오열돼 있으니…. 옥수수 알갱이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와르르 쏟아내는 웃음, 목젖이 보일만큼 시원스레 터뜨리는 웃음들이 그리워진다.

웃음은 묘약(妙藥)이라고 한다.

산케이(産經)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과학자들이 당뇨병 환자들에게 재미있는 만담 같은 것을 들려줘 웃게하는 실험을 한 결과 혈당치가 크게 낮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웃음의 효력이 입증되면서 식이요법, 운동요법에 이어 웃음이 당뇨병의 새 치료법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웃음은 전염성이 강해서 누군가 활짝 웃는 웃음은 이내 얼굴에서 얼굴로 번져나가 꼭 닫혀진 마음의 빗장도 풀게 만든다.

그래서인데, 억지로라도 웃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봐주는 이 없어도 길가 모퉁이에서 방실거리는 민들레처럼.

노란 민들레꽃을 보면 민들레처럼 살다간 우장춘(禹長春:1898~1959) 박사가 생각난다.

명성황후 시해 주동자였던 우범선(禹範善)과 일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던 우 박사는 어릴 적 아버지가 살해된데다 조센징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성장했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가난, 따돌림 등 인고의 세월을 지나 농학자가 된 그는 조국에 뼈를 묻겠다며 처자식을 남겨두고 홀로 현해탄을 건너왔다.

처절한 고독속에 불철주야 연구에 몰입하여 육종학분야에서 빛나는 업적들을 쌓은 우 박사. 그를 일으키고 지탱케 해준 것은 책상머리에 좌우명처럼 붙여져 있었던 글귀였다.

'밟혀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볼품없는 들꽃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계절이다.

어디서든 동그란 얼굴로 방실거린다.

연약해보이나 그 뿌리는 깊다.

이 봄에 민들레가 새롭게 보임은 무슨 연유일까.

전경옥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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