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공천, 이럴수가

입력 2004-03-10 09:15:02

지난 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클린턴과 부시(현 부시대통령 아버지), 그리고 무소속의 페로가 맞섰을 때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셋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더러운 속옷 세 벌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고뇌 때문인가, 당시 클린턴 당선자의 득표율은 예년 대선에 훨씬 못 미치는 43%였다(부시 38% 페로 19%).

오늘 우리 한국 유권자 앞에도 그러한 속옷들이 놓여 있다.

어느 당은 "우린 창당한 지 반년도 안 되는 새옷"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옷이면 뭘하나? 창당자금 불법논란으로 당사마저 옮겨야 하는 판이다.

그 새옷은 정말 너무 빠르게도 헌옷과 다름없이 더러워진 옷이 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다가오는 총선을 계기로 정당들이 대오 각성해서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소망해 왔다.

그런 점에서 각 당이 그동안 진행해 온 공천 작업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저마다 "개혁공천" "혁명적인 물갈이"를 고성으로 다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각 당의 공천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지금, 스스로의 소망이 너무나 순진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대대적인 물갈이를 했다고 하면서도 국민의 존경을 받는 명망가의 영입에 성공한 어느 정당도 없다.

이런 흉작은 역대 총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진기록이다.

먼저 여당이라 할 열린우리당을 보자. 집권당이기 때문에 유능인사 영입에 있어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보나 대통령 명령권내에 있는 각료 등 공직자 몇 명을 출마시키는 것으로 약효가 그쳤다.

그나마 서투르게 실시한 경선 때문에 애써 영입한 인사들과 기대를 모았던 정치신인들이 지구당위원장, 당료, 지방자치의원, 과거총선 낙선자 등 기존정치권과 토착세력의 장벽에 막혀 줄줄이 고배를 들었다.

참신성이나 물갈이 측면에서 신생정당의 면모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것은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5일 선대위를 구성하면서 공동위원장 4명을 두기로 했는데 그 4명은 현역의원 2명, 징발각료 1명, 그리고 모 포럼대표 1명이다.

앞의 3명은 기본적으로 노무현맨이고 보면 마지막 포럼대표가 영입인사의 대표격인 셈이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자임하고 있다.

따라서 명망 있고 능력 있는 인사들, 특히 교육.통일.노동 .인권 등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참여율이 높을 것은 불문가지이고 따라서 이들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은 당연할 것임에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노력을 안 했는지 못 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어떤가. 어느 당보다도 가장 먼저 대대적 물갈이를 외쳤던 당이기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그만큼 기대도 컸을 것이다.

지지자들이 한나라당의 물갈이에 기대를 건 것은 한나라당이 좀 더 강해져서 10년의 정권 불임(不姙)을 종식시키자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나라당에 계속 표를 주어온 사람들은 2002년 대선 연패 후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

한나라가 대선에서 진 것은 당의 성향 때문이 아니다.

비(非)한나라 진영이 대선공조 닷새 전까지도 단일후보를 못 정했을 정도로 전세는 필승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왜 졌는가? 그것은 아들의 병역기피논란으로 5년전 선거에서 젊은 표를 많이 잃은 이회창 후보를 연속 출마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표들은 보-혁(保-革)성향에 관계없이, 그리고 특히 월드컵축구 붉은 악마 응원에서 자신감을 얻은 기동력을 수단으로 하여 반 이회창으로 몽땅 쏠려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한국의 젊은 세대 전부가 반보수는 아니라는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앞으로 당이 그들의 정체성을 좌고우면 없이 떳떳이 살리고, 거기다가 야당성을 굳게 실천해 나간다면 기회는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공천실상은 이런 믿음들에 큰 실망을 주었다.

물갈이한 빈 자리는 확실한 보수성과 어느 정도의 야당성을 가진 인사들로 보충돼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는 대여투쟁에서 집념과 열의를 보여주었던 현직의원들이 오히려 희생당할 뻔하기도 했다.

마침 소신있는 일부 공천심사위원이 있어 막판에 두어 명이 구제됐지만, 한나라당의 이런 갈지자 행보가 텃밭의 표심에 어떤 요동(搖動)을 줄지 주목된다.

이밖에 민주당, 자민련의 공천작업도 진행 중에 있지만 앞에서 거론된 두 당의 경우처럼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점에서는 용하게도 똑같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무슨 희망으로 투표소엘 간단 말인가. 더구나 이번부터는 유권자 한 사람이 두 표(후보자와 정당)를 행사해야 한다는데, 정당들도 밉고 후보자들도 마뜩잖다면 그 두 표를 어디다 던져야 하나. 안타까운 심경이다.

최재욱 전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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