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가야-(35)노를 저어 바닷길 헤치고

입력 2004-03-08 09:10:00

중국 산둥(山東)성 롱청(榮成)시 청산(成山)진 청산지아오(成山角). 인천이나 태안반도에서 서쪽으로 보면 황해 건너 한반도를 향해 뿔처럼 툭 튀어나온 곳이다.

산둥반도의 최동단 지역으로, 산봉우리처럼 생겼다고 '성산각'으로 이름지어졌다.

롱청시에서 50km를 달려 도착한 성산각은 2월의 매서운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소형 승용차가 좌우로 흔들거릴 정도였다.

성산각으로 이어지는 중국 북동부의 하늘도 온통 시커먼 석탄가루로 뒤덮였다.

바다와 맞닿은 동쪽 끝 뭍은 바다 건너간 대가야의 후손을 그렇게 힘겹게 맞았다.

성산각에서 바라본 황해는 뿌연 안개에 휩싸였고, 그 속내를 알기 어려운 바닷속 만큼이나 물결색도 누랬다.

황색 파도를 헤치고 저 멀리 대 여섯 척의 선박이 줄지어 중국 대륙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무역선이었다

1천500년 전, 거센 파도를 가르며 험난한 바닷길을 뚫고 있는 대가야의 목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목선 가득 양식을 싣고, 항해 기술이 뛰어난 이들이 대가야의 사신을 모시고 수십일, 아니 수달이 걸려 천신만고 끝에 대륙에 도착했을 터. 어쩌면 수많은 목선이 부서지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등 수 차례 실패를 거듭한 뒤 뚫은 바닷길인지도 모를 일이다.

성산각에서 황해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는 중국 '국가해양국 성산각해양환경관측소'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고대부터 항구로 활용돼 온 성산각 일대가 92년 개방 이후 관광지로 탈바꿈했다"고 설명했다.

환경관측소 아래 해변가는 음산했다.

거센 파도만 바위를 두드렸고, 인적은 없었다.

방치된 목선 하나와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달린 폐선박 1척, 주변에 쌓인 쓰레기 더미가 옛 대가야의 목선이 정박한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황량한 해변가와 달리 뭍으로 이어지는 성산각 일대는 크고 작은 건물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진시황제를 기리는 건축물과 기념탑, 전망대 등은 이미 관광 명소였다.

성산각이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진나라 시황제가 두 차례 순행했던 지역인데다 황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산각에서 4km쯤 떨어진 롱청시 청산진 시시아취(西霞口) 롱이옌(龍眼)항. 지난 99년 개항한 이 항구는 성산각과 달리 한국의 해운항만청과 같은 버젓한 관청(2001년 신축)을 갖추고, 한반도와 본격적인 해상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용안항 국제후선청 관계자는 "이 곳은 경기도 평택항과 교역하는 무역항"이라며 "1주일에 세 차례 무역선을 왕복 운항하며, 한국 상인은 1회 평균 800명, 중국 상인은 300명씩 드나든다"고 설명했다.

산둥반도에는 현재 롱이옌항을 비롯해 인천항 등과 교역하는 롱청시 스다오(石島)항과 웨이하이(威海)시 웨이하이항 등 3개 무역항이 한반도와 교류하고 있다.

400년대와 500년대, 대가야와 백제의 사신이나 무역상이 탄 목선이 닿았던 곳에 천년의 역사를 훌쩍 넘어 한반도의 무역선이 그 끈을 잇고 있다는 것.

호남 동부 일대와 섬진강 유역을 장악한 대가야는 479년 마침내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의 장을 열었다.

중국 남제서 동남이전에는 '가라국(加羅國)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建元) 원년에 국왕 하지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받쳤다.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이란 작호를 수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가야 하지왕이 중국 남제와 교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던 것.

기원전 21세기 하(夏) 왕조로 출발한 중국은 기원전 770~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년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 기원전 206~220년 한(漢), 220~280년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를 거쳤다.

또 280~420년 통일왕조 진(晉), 420~581년 남북조로 이어졌다.

남북조시대 중국의 남방에는 송(宋) 제(薺) 양(梁) 진(陳) 네 왕조가, 북방에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 다섯 정권이 교체됐다.

이후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왕조로 이어졌다

대가야 하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시기는 바로 남북조시대 남제(薺;479~502년)가 난징(南京)을 근거로 나라를 세운 건국 원년이었다.

남제의 초대 왕은 고제(高帝)였고, 연호는 건원이었다.

난징대 역사학과 후아시앙(胡阿祥.41) 교수는 대가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과 관련, "제나라 건국에 대한 축하사절단인 동시에 중국과 통상관계를 맺고, 한반도에서 정치적 입지도 넓히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중국 교역의 물꼬를 트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자국의 정치적 위상과 입지를 높이려는 다각적인 포석을 깔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대가야는 어떤 루트를 통해 멀리 난징까지 도달했을까. 당시 대가야는 섬진강 유역을 확보한 상태여서 섬진강 하구인 하동을 거쳐 남해로 나갔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또 대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 동부까지 진출했고, 백제와 장기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호남 내륙을 통해 곧바로 서해로 나갔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일단 바다로 나간 대가야의 사신은 거친 파도와 바람을 피해 한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북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난징대 역사학과 쳔더즈(陳得芝.70) 전(前) 교수는 "대가야는 한반도 해안선을 따라 중부로 올라간 뒤 황해를 건너 산둥반도에 정박하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남쪽 양쯔강(揚子江) 하구를 통해 난징에 진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산둥반도에서는 육로로 난징까지 갔을 수도 있지만, 당시 남조와 북조가 갈린 상황에서 이 반도가 북조 영역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쳔 교수는 당시 한반도 남해에서 난징으로 향하는 직항로는 풍랑이 심했던 황해의 여건과 당시 항해기술로 볼 때 불가능한 루트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같은 추정과 관련, 일본 도쿄대에서 고대 왜(倭)와 중국간 교통로를 주로 연구한 키로 야스히코(木宮泰彦) 전 교수의 견해를 소개했다.

키로 교수는 1926년 '구지교통사(舊支交通史)'란 책을 통해 왜와 중국 남조와의 교통로를 왜-한반도 남해안-한반도 서해안-중국 산둥반도-중국 동해안-양쯔강 하구-난징으로 분석했다.

키로 교수는 특히 한반도와 중국 남조를 잇는 해양로는 수(隋)나라 때까지 이 한 루트만 이용하다 항해술이 발달한 당(唐)대부터 한반도 남해안에서 양쯔강 하구로의 직항로를 비롯해 4개 루트를 뚫었다고 지적했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와 계명대 노중국 교수도 '400년대 후반 백제가 중국과 교류할 당시 고구려가 해양루트를 가로막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들어 대가야도 고구려 권역에 인접한 서해안 중부까지 올라가 산둥반도로 항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가야는 이렇게 거센 바람과 파도, 고구려의 위협 등을 헤치고 드넓은 대륙, 중국까지 진출하는 루트를 뚫었다.

가야제국 중 어느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한 국제교류를 성사시켜 그 위세가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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