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물도, '동양의 나폴리'

입력 2004-03-04 11:30:47

남쪽에서 시작한 봄은 훈풍을 타고 하동 포구를 거쳐 섬진강 뭍으로 오르고 또 한편으론 외딴섬에 동백을 피운 뒤 남해가 시작되는 통영 앞바다로 올라온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 그 부속 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소매물도를 간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가 선착장을 파괴해 아침 일찍 매물도로 가는 배를 탔다. 정원이 120여명쯤 되는 배다. 다른 섬에 가는 배들과 달리 누워서 갈 수 있는 선실이 없다. 갑판도 없이 그저 의자에 앉아 바다를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매물도에 내리니 소매물도로 가는 개인선박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옮겨 탄다. 파도가 제법 세다. 고기잡이배가 내는 속력이 그리 대단할 리 없건만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쾌감이 짜릿하다. 바닷물이 배로 튕겨 들어올 때마다. 배 앞쪽에서 감탄이 섞인 비명소리가 들린다.

선착장이 없어 암초에 배를 붙이고 승객들이 내린다. 내려서도 길이 없다. 해안 바위를 몇 개 넘어 어렵게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20여채나 될까? 돌로 만든 담벼락에 키낮은 지붕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 지게를 지고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비탈진 마을길을 오르며 보니 빈집이 많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사람이 없다.

배에서 내린 여행객들이 익숙한 듯 모두 산쪽으로 오른다. 챙겨간 충무김밥을 빈집에다 풀어놓고 아침을 먹는다. 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옥빛바다와 어촌 가득 담겨있는 봄햇살과 함께 하는 김밥 맛이 기가 막히다. 점심때 먹을 충무김밥을 빈집 한곳에 숨겨두고 마을로 오른다. 제법 번듯한 '다솔산장'에서 커피나 한잔마시려고 물으니 키우고 있는 시베리안 썰매개 '누리'가 강아지 24마리를 낳아 찻집에 온통 개를 풀어놓아 어렵다 한다. 새끼 놓은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가까이 가니 어미가 사납게 짖어댄다.

등대섬과 소매물도를 잇는 물목이 지금 열려 있으니 빨리 가면 걸어서 등대섬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산중턱에 있는 '힐 하우스'에 가면 커피를 마실 수 있을거라 한다.

썰물때라는 소리에 정신없이 언덕을 오른다. 가파른 언덕을 10여분 오르니 숨이 가빠오는 순간에 동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몇백년은 족히 된 것 같은 고목들이다. 가지마다 검붉은 동백꽃이 피었고 더러는 꽃망울을 막 터트리려는 녀석들도 있다.

언덕위에 분교터가 있다. 1961년에 개교해 1996년에 13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됐다는 교적비가 있고 그 위에 식사와 차 그리고 숙박이 가능하다는 표시와 함께 '힐 하우스'라는 간판이 있다. 썰물때라 나중에 들러보기로 하고 폐교 우측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온 산이 동백나무다. 망태봉 정상에 이르면 옛날 밀수선 감시초소로 쓰던 세관초소가 나온다. 폐허가 된 채로 여기저기 산정상에 쇳덩이들이 녹슬어 가고 창문은 다 깨져 있다. 이렇게 기가 막힌 풍광속에 버려진 인공구조물의 추악함이 씁쓸하다.

서쪽으로 난 숲길을 잠시 헤치고 나서니 등대섬의 풍광이 펼쳐진다. 잠시 숨이 막히는 아름다움에 움직일 줄 모른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광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저 꿈나라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갈색 언덕위에 하얗게 외로이 서 있는 등대, 그 옆에는 벼랑위에만 몇 그루의 해송을 이고 있는 기암절벽, 그 뒤로는 쪽빛바다가 봄 햇살을 부딪혀내고 이따금씩 오가는 화물선... 그림속 풍경 그대로다. 많은 섬들을 다녀봤지만 이런 풍광을 가진 섬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정상 밑 너럭바위에 앉아 넋놓고 등대섬을 바라본다. 앞서간 여행객들도 여기 저기 바위에 앉아 망부석이 되어 있다. 그저 그대로 이렇게 바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상념에 잠긴다. 뒤에 오던 사람들도 잠시 탄성을 지르더니 이내 긴 침묵에 빠진다.

망태봉 남쪽으로 내려오니 해풍과 파도에 쓸려 내려간 아슬아슬한 언덕이 있다. 드넓은 초지끝에 만들어진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 절벽끝에서 한 가족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고 태양에 반사된 은빛 바다에 실루엣으로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그림이다.

초지에 드러누워 본다. 훈풍이 코끝을 간질고 망망대해 외딴섬에 떠 있는 감회가 그만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 한 마리가 졸졸 따라 온다. 사람이 그리운 외딴섬에 개조차도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계곡따라 난 길을 내려가 등대섬으로 가는 물목에 도착하니 이미 물이 절반이상 차 있어 건너지 못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은 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온다. 온 섬이 동백 밭이다. 올 때 지나쳤던 힐하우스에 들른다. 너무나 고즈녁한 풍광이다. 아무도 없다. 몇백년 된 동백나무에 달아 놓은 그네에 앉아 본다. 봄 햇살이 들어 올 여유조차 없이 무성한 동백나무 밑에서 그네에 앉아 옥빛 바다를 보니 저절로 시인이 된다.

'땡땡땡' 현관앞에 매달린 종을 쳐본다. 옛분교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북쪽에는 통영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그네를 두 개 더 만들어 놓았다. 중간에 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 그리고 그 옆에는 오수를 즐길 수 있는 해먹이 있다. 여기서 그렇게 몇날 몇일을 보내고 싶은 강한 유혹에 사로잡힌다. 배시간에 맞춰 서둘러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숨겨둔 도시락을 먹으며 이번 여름 휴가에는 반드시 이곳에 한번 더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바닥만큼 작은 섬 소매물도, 하지만 감동은 하늘만큼 크고 바다만큼 넓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을 만들려면 평생에 한번은 와봐야 할 섬이다.

취재수첩

◇가는 길 : 구마고속도로→마산→통영→여객선 터미널(055-642-0116)

◇배편 : 여객터미널에서 오전 7시, 오후 2시 하루 두차례 매물도 가는 배가 있다. 요금 1만3천2백원(편도), 매물도에서 소매물도까지 사선을 이용해야 한다.(요금 성인편도 5천원, 선주 017-550-7460, 소매물도 유람은 6인기준 3만원, 등대섬에 올라갈 시간도 준다.)

◇주의 사항 : 소매물도에는 식당이 없고 구판장은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반드시 먹을 물과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민박집이 있지만 예약은 받지 않는다. 여객선 터미널 맞은편에 많은 충무김밥집과 숙박시설이 있다. 다솔산장에서 www.somaemuldo.com을 운영하며 소매물도 소식을 여행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사진,글 정우용기자 ( sajah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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