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상종가 행진이 연일 계속이다.
지난 시대 우리들의 삶을 가위눌리게 했던 국가폭력을 고발한 '실미도'라는 영화가 드디어 관객 천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에 이어, 한 형제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전쟁의 상흔을 조명한 '태극기 휘날리며'도 600만을 가볍게 넘어서며 그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1천만이라는 수치는 15세 이상의 국민 가운데 세 명 중 한 명 꼴로 영화를 보았음을 뜻한다고 하니, 한국영화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한다면, 근래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는 이 두 영화가 아니라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였다.
70년대 후반 서울 강남의 한 남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청춘의 반항과 방황을 담담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이 영화가 내 감정선을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두 영화의 내용이 간접체험된 것임에 비하여, '말죽거리 잔혹사'는 적어도 내 또래의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그 리얼리티가 더 큰 호소력을 지닌다.
부모의 사회적 신분이 곧 학교에서 학생의 처우를 결정했고,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는 날이면 교실의 가방은 어김없이 불심검문을 당했으며, 그러다가 불순한 소지품이라도 발견될라치면 교무실에 불려가 '타작'을 당하던 일은 그 시절 남자고등학교에서는 하나의 일상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교련선생은 언제나 군복차림에 지휘봉을 휘두르며 다녔고, 6.25 추념 시가행진이라도 임박해 오면 수업은 뒷전이고 우리는 아침부터 '연병장'에 소집당해 열병과 분열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연습용 목총 대신 M1소총이라도 진짜 지급받게 되면 어깨에 '힘'을 가득 주고 여학생들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곤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남자가 되어갔고, 얼뜨기 마초증후군의 중증 환자들이 되어갔다.
그것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걸 그때는 알 리가 없었고, 남성중심적 권위주의 문화가 확대재생산되는 제도적 시스템이라는 걸 눈치챌 수가 없었다.
푸코로부터 귀동냥한 어설픈 개념들을 들먹이면서, 근대적 권력이 작동하는 규율 공간으로서의 학교의 본질을 까발리며 그 젊은 날의 경험들을 이성적으로 배반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마지막까지 일소(一掃)되길 저항하는 기억의 침전물들일랑 '추억'으로 포장하여 감성의 책갈피에 따로 갈무려 놓은 채로.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영화는 그 책갈피를 다시 들춰내며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런 권위주의적인 교육문화로부터 자유로운가? 그 시절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본인도 세뇌된 채 학생들에게 그것을 부지런히 이식시키려고 애쓰던 선생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자신의 인생경험을 보편화시켜 자식의 장래를 마음대로 결정지어버리던 그 부모들은 이제 없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여 다행히도 우리 아이들은 영화 속 주인공이 학교를 떠나며 내뱉던 저주의 말, "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라는 그 통한의 말을 퍼부으며 학교를 떠나는 일이 이제는 정말 없는가?
며칠 전 짬을 내 잠깐 들렀던 큰 아이 졸업식에서 학교 관계자들은 지역 유지들뿐만 아니라 남편 대신 참석한 일부 '사모님'들까지 일일이 소개하느라 여전히 분주하였고, 교장은 교육청 학무과장의 참석에 거듭 감사를 표하는 말로 축사의 들머리를 장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또 그 하루 전날, 이 나라 교육계의 수장은 전학교의 학원화를 넘어 전가정의 학원화를 가능하게 하는 야심 찬 사교육비 절감정책을 발표하였고, 이에 화답하여 일부 언론은 그런 발상에 담겨 있는 교육철학의 빈곤성을 질타하기보다는 그 성적지상주의 정책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조건들을 친절하게 점검해주기에 바빴다.
그때도 그랬듯이,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의 인생에 대한 결정권이 '어른들'에게 저당잡혀 있었듯이, 우리 역시 아이들의 인생행로에 대한 결정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폭력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폭력적인 부모가 되듯이, 그 권위주의의 악순환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는 일은 그래서 답답하고 눈물겹다.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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