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한나라, 다시 눈을 감아라

입력 2004-02-16 11:30:24

화담(花譚) 선생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울고 서있는 행인을 만났다.

선생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니, "저는 다섯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해가 지났는데 오늘 집을 나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이 뜨이고 천지만물이 훤하게 보이는지라 너무 기뻐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니 늘 다니던 길이 낯설고 어딘지를 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선생이 답하기를 "내가 너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다시 눈을 감아 보아라. 그러면 네집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는 익숙했던 길이 눈을 떴을 때 오히려 더 서툴고 낯설듯이 뭔가 새로운 눈을 뜨고 변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려할 때 앞길이 부딪히고 막혀 되레 우왕좌왕 하게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는 낯선 길을 쫓기듯 서둘러 나아갈 게 아니라 한번쯤 다시 눈을 감고 갈길을 가다듬은 뒤에 새롭게 눈을 뜨고 나아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인생의 길에서만 그런것이 아니라 때로는 조직이나 국가도 그런 마음으로 길을 가야 한다.

요즘 한나라당을 보고 있으면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화담 선생이 만난 장님 행인을 닮아 있다.

한 개인이 길을 헤매도 낭패인데 하물며 한 국가의 국정 동반자인 야당이 길을 헤매고 있다는 것은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나라호의 선원들은 선장의 리더십을 신뢰하지 못하고 선장은 선원들을 장악하지 못한채 자중지란의 소용돌이속에 빠져 항로를 잃고 허우적대는 모습이 역력하다.

공천심사를 싸고 연일 낙천그룹들이 '밀실공천' 시비를 걸며 항의시위로 날을 새고 범법 동료의원을 감옥에서 풀어내는데 정신이 팔린채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FTA처리는 나몰라라 함으로써 수백만표가 날아가는 판에도 여전히 조타수 없는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표류하는 사이 열린우리당은 벌써 총선 10대핵심공약을 내놓고 정책정당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그들은 한나라당의 약점을 십분 이용해가며 불법정치자금 국고환수특별법 제정이니 비리단체장.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면책특권제한 같은 법안을 발빠르게 내걸어 국민들의 정치 혐오의 곪은 환부가 어딘지를 용케도 잘 끄집어내 긁어주고 있다.

한나라당의 아킬레스건을 한껏 효과적으로 건드리며 화난 국민들을 달래 표를 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민경선으로 신인후보가 현역의원을 제치는 이변을 연출해 정치적으로 신선한 시선을 끌며 보스(노 대통령)의 실점(失点)에도 불구하고 대장이 잃은 점수를 부하들이 똘똘뭉쳐 벌충해가고 있다.

총선 전장(戰場)에서 적군은 이처럼 진열을 가다듬고 있는데도 적전 분열로 쪼개지고 있는 한나라당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지내는데 익숙해 있다가 눈을 뜨자 되레 길을 잃은 장님 행인 얘기처럼 정치개혁의 길을 같이 가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에 눈을 뜨긴 떴는데 가야할 길도 길찾는 방법도 모르고 울고 서 있는 형국이다.

오랜 보수의 타성 때문에 미처 세상의 변화를 뒤따라오지 못한 탓인진 모르나 참으로 딱하다.

동료 서청원을 빼내면서 날아간 표가 열린우리당의 대장(隊長)이 가끔씩 '말씀' 잘못 할때마다 날아가는 표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는 계산조차 못하는 쑥맥같은 야당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화담 선생의 충고대로 다시 눈을 감고 갈길을 가늠한 뒤 새롭게 눈을 떠라. 다시 눈을 감으라는 얘기는 곧 무욕무념(無慾無念)의 초심으로 되돌아가라는 얘기다.

지금 국민의 눈에 비친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이념노선조차 전통 보수인지 개혁을 흉내내는 반쪽 보수인지 헷갈려 보이는 수준이다.

한나라는 믿고싶지 않겠지만 기존의 지지기반이던 보수층도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고 열린우리당의 급진개혁성향에 대한 우려를 가진 계층으로부터도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슬프게 눈을 뜨다 길을 잃은 한나라당은 다시 눈을 감은 뒤 제대로 눈을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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