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싹 마른 갈대와 풀이 무성했다.
누구도 찾지 않는 무덤. 벌초가 돼 있을 리 없었다.
옆으로는 지방도가 갈라지고, 인근에는 자그마한 저수지만 천년 이상의 묻힌 역사를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현지 주민들의 조상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무덤 1기와 주변의 자그마한 무덤들은 1천50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한자리에 안착,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듯했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 1호 무덤. 바닥 지름이 20m는 족히 넘는 이 고분을 학계는 '왜(倭)계 무덤'으로 보고 있다.
무덤 속에서는 대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이 나왔다.
낙동강에 인접한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1천500년 전, 왜인은 어떤 루트로,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을까.
경남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1,503m)에서 발원한 남계천(濫溪川)을 원류로, 거창을 비껴 흘러내리다 백운산(1,279m)에서 남동류하는 위천(謂川)을 합친 뒤 다시 산청 진주 의령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남강. 이 강이 낙동강에 접하는 하류에서 북쪽 10여km 지점, 낙동강과는 바로 1.5km 떨어진 곳에 '경산리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경산리 1호 무덤은 가로로 흙 구멍을 뚫어 안쪽에 돌방을 만든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이다.
현실(玄室) 안 거대한 돌관(石棺)을 비롯해 문지방 돌, 봉분(封墳)의 지붕 덮개 돌(楫石) 등 특이한 양식으로 구분쌓기(段築)를 한 무덤이다.
돌집모양(石屋形)의 관은 현실 안 뒷벽과 나란히 설치됐다.
가야나 삼국시대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무덤 구조를 띠고 있어 눈길을 모은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500년대를 전후해 일본 규슈(九州) 지방의 왜 지배층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무덤은 규슈 지방의 서쪽 허리에 해당하는 구마모토(熊本)현 야쓰시로(八代)시 류호쿠(龍北)정 '오노이와야(大野窟) 고분'을 꼽을 수 있다.
이 무덤은 역시 횡혈식(橫穴式) 구조로, 현실(길이 5m, 폭 3.5m)과 천장(높이 6m) 규모가 상당하다.
무엇보다 현실 안에 있는 거대한 돌관과 문지방 돌, 지붕 덮개 돌, 구분쌓기 등이 '경산리 1호 무덤'의 양식을 그대로 빼 닮았다.
지난 2000년 경상대박물관 발굴조사 때 경산리 1호 무덤 안에서는 대가야 지배층의 의례(제사)용 토기인 원통모양 그릇받침과 신라후기 양식 토기가 출토됐다.
무덤은 500년대 중반에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렇다면 경남 내륙지역에 어떻게 왜계 무덤이 나타나고, 또 그 속에서는 대가야 유물이 왜 묻혀 있을까. 경상대 조영제 교수는 "무덤 양식이 왜계인 것은 확실하고, 묻힌 사람도 일본열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400년대 후반 이후 대가야권에 편입된 지역에 왜인의 무덤이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가야가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누릴 때 정치.경제적 교류나 사신으로 넘어온 왜인이 이 땅에 장기간 머물다 묻힌 것은 아닐까. 왜계 무덤과 제사용 토기로 미뤄볼 때 대가야와 왜 지배층간 정치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분명했다.
또 묻힌 사람은 왜인 또는 대가야 및 왜와 관련된 상당한 신분의 인물임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는 어떤 루트를 이용해 내륙으로 들어왔을까. 대가야가 낙동강을 완전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왜는 경남 고성(소가야)이나 하동을 통해 진주에 진입한 뒤 남강을 따라 의령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유력했다.
대가야 토기가 집중 출토된 고성읍 '율대리 고분군'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사(帶沙;하동)'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경산리 고분군'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져 낙동강에 인접한 지역인 의령군 지정면 유곡리 '백산마을'에는 400년대 후반 대가야 세력이 미친 '유곡리 고분군'이 있다.
고분군 북쪽에는 박진나루가 있고, 낙동강 건너 비화가야의 근거지인 창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백산마을 서쪽 뒤 해발 100m의 산 능선 정상에 분포하는 이 무덤에서는 400년대를 전후한 비화가야(창녕) 양식 토기와 400년대 후반 대가야 양식 토기가 함께 나왔다.
이 지역 세력이 낙동강 바로 건너 동쪽에 있던 비화가야와 교류하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권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악성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省熱縣)'으로 꼽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이 지역을 대가야의 영향권에 든 가야제국 중 '사이기국(斯二岐國)'으로 보고 있다.
남강 하류의 의령과 중상류의 산청 지역을 편입한 대가야는 이후 섬진강 루트와는 별개의 바닷길을 뚫기 위해 남강 줄기를 타고 진주에 진출했다.
고성이나 하동을 통해 남해로 나갈 수 있는 교통의 중간기지로 진주가 유력했던 것. 진주시 옥봉남동의 '수정봉.옥봉 고분군'이 그 궤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고분군은 뒤편 북쪽으로 산이 둘러싸고, 남쪽 앞으로는 주택과 빌딩이 빼곡이 들어서 있으며 그 너머에는 U자 형태로 시내를 관통하는 남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독립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당초 무덤 7기(수정봉 1~3호, 옥봉 4~7호)가 남북 방향으로 늘어섰던 이 고분군은 이젠 도굴과 개간, 건물신축 등으로 1기(수정봉 2호 추정)만 남아 경상남도기념물 1호로 지정돼 있다.
이 중 수정봉 2, 3호와 옥봉 7호 무덤이 1910년, '조선 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발굴(?)됐다.
무덤은 모두 500년대 전반 백제의 영향을 받은 횡혈식 돌방 구조를 띠고 있으나 토기 등 유물은 대가야 양식이 주류를 이뤘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나온 유물은 모두 일본 도쿄(東京)도 다이토(台東)구 혼고(本鄕)의 도쿄대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일본 총독부가 발굴이란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샅샅이 뒤진 유물은 모두 일본의 재산이 돼 있는 셈이다.
옥봉.수정봉 고분 3기에서 나온 유물은 가야 지배층의 의례용 토기인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비롯해 목 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사발모양 그릇받침, 말 재갈, 말 발걸이, 큰 칼, 등잔모양 그릇 등이다.
이 무덤과 유물은 400년대 후반 진주지역이 토착 지배층을 장악한 대가야의 '간접 지배권'에 들었고, 이후 백제의 세력이 진출해 온 양상을 반영한 것이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옥봉.수정봉 고분군과 마주보고 있는 '가좌동 고분군'은 소가야(고성) 양식의 무덤 구조와 유물을 갖춰 당시 이 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소가야의 정세도 살펴볼 수 있다.
대가야는 400년대 후반 의령, 산청, 진주 등 남강 유역을 품에 안고, 고성과 하동으로 향했다.
남해로 이어진 바닷길을 둘러싸고 백제와 치열한 격전을 치르면서….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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