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식 여론조사 '정치 공해'

입력 2004-02-12 11:31:01

여론조사가 정당 공천의 터줏대감이 되면서 '묻지마식' 여론조사가 횡행하고 있다.

한 지역에 적게는 한두 차례에서 많게는 십여 차례씩 여론조사가 실시된 곳도 있다.

심지어 일부 의원은 ARS 여론조사 기기를 아예 구입, 입맛대로 여론조사를 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여론조사에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유권자로선 일종의 '조사 공해'가 아닐 수 없다.

한나라당 박시균(朴是均) 의원의 지역구인 영주는 지난해 말부터 모두 14차례의 여론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박 의원이 이영탁(李永鐸) 국무조정실장간 대결에서 오차범위내 접전이 이어지자 다른 대안을 찾을 요량으로 여론조사가 이뤄진 것. 당 차원은 물론 개인, 상대당까지 그야말로 여론조사 경쟁이 붙은 상태다.

이 지역 한 공천신청자는 지난달 말 ㅇ사와 600여만원에 계약을 맺고 여론조사를 했지만 미덥지 않아 지난 5일 또다른 ㅇ사와 다시 계약을 맺었다.

3천만원을 주고 모두 10차례 여론조사를 하기로 한 것. 이 관계자는 "선거도 치르기 전에 여론조사 비용에 종자돈을 다 쓰게 생겼다"며 울상을 지었다.

4선의 김일윤(金一潤) 의원도 지난주 서울 및 대구지역 여론조사 업체와 각각 조사 계약을 맺었다.

공천심사위가 김 의원의 지역구인 경주를 심사보류 지역으로 분류한 뒤 여러 억측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ㅎ사와 1천여만원, ㅇ사와 800여만원에 여론조사 계약을 맺은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당 김만제(金滿堤) 의원은 일찌감치 24회선 규모의 ARS 여론조사 기기를 구입했다.

조사기관에 한번 의뢰하는데 수백만원이 드는 수월찮은 경비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한나라당 대구시지부가 구입했고 권오을(權五乙).윤영탁(尹榮卓) 의원도 몇 해 전 기기를 샀다는 후문이다.<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 연구소는 공천심사위의 ARS 여론조사를 거의 대행하고 있다.

경합지나 외부 영입지역, 현역 물갈이 지역이 주요 여론조사 대상지. 1천명의 샘플로 한번 조사를 하는데 대략 100만원이면 충분하지만 요즘은 200만원 가까이 경비가 든다고 한다.

불법대선자금 파동 이후 조사 응답률이 뚝 떨어지면서 2만통의 전화를 걸어야 겨우 1천명의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외부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할 경우 최소 300만원에서 많게는 600만원까지 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나마 돈을 아끼는 셈이다.

당 관계자는 "여론조사 경비는 920여명의 공천신청자로부터 각각 200만원씩 접수비 조로 받은 18억4천여만원으로 충당한다"며 "조사 한 번하는데 200만원이 소요된다 가정할 때 10억원 정도면 500번 정도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와 여론조사를 아무리 해도 남는 장사"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론조사가 무차별적으로 남용되면서 '역선택' 현상이 드러나고 조사 정확도와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등 여론 왜곡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또 지난주에는 공천심사위가 모 여론조사 기관의 부실 조사를 확인, 논란 끝에 향후 이 기관에 여론조사를 의뢰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ARS 조사는 여론의 경향성을 알 수 있지만 신뢰도를 보장하진 못한다"며 "요즘 정당분위기가 지나치게 여론조사를 신봉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사진: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최병렬 대표가 홍사덕 총무와 무언가 의논을 하고있다. 김영욱기자 mirage@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