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느림, 멈춤, 비움은 삶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나아가 자연스럽게 삶의 질을 높여준다'. 물질적으로 우리보다 풍요한 나라의 사람들은 벌써부터 이같은 진리에 눈을 떴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던져버리고, 느린 삶을 통해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 슬로 라이프에 심취하고 있다.
이미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는 슬로 라이프가 사람들의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도도한 물결로 자리잡고 있다.
고액 연봉자들의 변신
◇'다운시프트족(族)' 늘어나는 유럽="시간이야말로 벤츠 승용차나 디지털 가전제품 못지 않게 귀중하다". 요즘 유럽에서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흐름이 두드러지고 있다.
높은 수입과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그래서 '다운시프트족(族)'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다운시프트(downshift)의 사전적 의미는 저속 기어로 바꾼다는 뜻이지만 여기선 속도를 우선하는 삶에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유럽의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모니터에 따르면 2002년 한 해에 190만명이 스트레스를 피해 직장이나 집을 옮겼다.
또 1천200만명이 급여를 삭감하는 대신 근로시간 축소를 택했다.
다운시프트족이 지난 6년간 약 30% 이상 증가했고, 2007년에는 1천6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다운시프트가 가장 활발한 국가는 유럽에서 '일벌레'로 소문난 영국인들. 직장이 건강을 해친다는 비율이 절반에 달하고, 업무 부담 때문에 제대로 섹스를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비율이 20%에 달하는 사회 환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영국의 다운시프트족은 원하는 삶을 위해 고소득을 기꺼이 포기하고 있다.
수억원에 이르는 봉급을 받던 런던의 증권사 한 직원이 마술사가 돼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유럽의 다운시프트족 일부는 아예 주거지를 도시 외곽이나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전원으로 옮긴다.
이들 중에는 금융업이나 법조계, IT(정보기술) 업계 종사자들이 많으며 연령층은 30대와 40대가 대부분이다.
50세가 되기 전에 은행 대출금을 갚고 가족, 친구들과 비록 소박하지만 여유있는 삶을 즐기는 것이 요즘 유럽인들의 가장 큰 소망이다.
프랑스 틱낫한 스님 '열풍'
◇틱낫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화' '힘' 등의 저서로 유명한 틱낫한(78) 스님이 운영하는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의 공동체 마을 '플럼 빌리지(자두마을)'.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수련회에는 40여개 나라에서 수천명이 몰려들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플럼 빌리지의 일과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법당에서 함께 30분 좌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전 8시 30분부터 낮 12시까지 틱낫한 스님의 법문과 오후 4시 30분 조별 모임에서 서로 깊이 경청하고, 마음을 터놓는 시간이 하루 일과의 뼈대다.
나머지 시간엔 그늘에서 노닥거리든 낮잠을 자든 수련생들의 자유다.
특히 30분 정도에 한 번씩 울리는 종소리 명상을 통해 수련생들은 모든 동작을 중지하고 숨만을 지켜봄으로 깨어있는 수행을 한다.
기계처럼 몸과 마음을 혹사하기에만 급급하며 한 번도 쉬어보지 못한 영혼들은 나무 밑 그늘과 해먹 위에서 몸은 완화되지만 의식은 깨어나는 체험을 한다.
이곳에서 수행을 한 사람들은 "뭔가에 쫓기는 듯한 압박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날 수 있다"는 소감을 털어놓는다.
틱 스님의 법문은 늘 '깨어있음(Mindfulness)'을 강조한다.
"자신의 나쁜 습관이라고 화를 내지 마세요. 그 습관과 싸우지 말고, '안녕'이라고 미소 지으세요. 그렇게 미소를 보낼 때 서서히 변화될 수 있답니다". 스님의 위로 섞인 법문에 마음과 몸이 평화로워지는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 나간다.
고어의 명상 생활화
◇미국의 '명상붐'=동양 전래의 심신수련법인 명상(meditation)이 미국 등 서양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타임'지는 얼마 전 '명상의 과학'을 주제로 한 커버스토리에서 명상은 문화적 차원 못지 않게 의학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을 비롯해 1천만명 가량의 성인들이 명상을 생활화하고 있다.
특히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명상이 '비누거품 목욕'에 비유될 정도로 심신의 스트레스 해소에 뛰어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명상은 또 우울증, 과잉행동, 주의력 결핍증 등과 같은 심적 불균형 상태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활용되고 있다.
"이젠 속도에 지쳤다"
◇슬로 라이프 실천하는 일본=지난 해 6월 22일 일본 도쿄의 명물인 도쿄타워를 비롯, 전국의 빌딩과 시설 2천여 곳에 오후 8시부터 두시간 동안 일제히 불이 꺼졌다.
'느린 것이 아름답다'는 책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 메이지대 교수 등 시민단체가 주도한 행사였다.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촛불을 켜들고 어두운 도시 속에서 슬로 라이프의 뜻을 되새겼다.
거품경제 붕괴, 장기 불황으로 추락한 일본에도 슬로 라이프 바람이 불어 사람들의 지친 삶을 위로하고 있다.
일본 아이치현의 젠만초(千万町)는 편의점도 없고 휴대전화도 불통인 '불편 그 자체'로 도시사람들에게 슬로 라이프를 '선물'하고 있다.
200여명의 주민들은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도시인들이 이주해오거나 놀러올 수 있도록 300년된 농가를 개조해 농촌생활 체험 시설로 내놓았다.
이곳에서 도시인들은 농작물을 키우고, 된장 담그기 같은 전통생활 체험을 통해 슬로 라이프에 젖어들고 있다.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가 일본인의 생활에 파고듦에 따라 이에 편승한 상품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식품회사인 에비스는 조리시간이 다른 제품보다 더 걸리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자연의 맛을 강조한 '슬로 라이프 스튜'를 출시, 한 해 10억엔(한화 1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도쿄 아카사카의 한 책방은 '화(和), 슬로 라이프, 아시아, 에스닉'이라는 코너를 마련했다.
슬로 푸드를 다룬 책이나 느긋한 풍경의 아시아 마을을 촬영한 사진집 등 2천여 종류의 서적을 갖추고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연휴는 짧고 실망은 길다…5월 2일 임시공휴일 제외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