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갑신정변

입력 2004-01-02 09:55:42

최근 10여년간 개혁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이른바 '개혁피로증'이란 말처럼 개혁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개혁이 현재진행형 화두인 것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부분에서 개혁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당위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개혁도 명분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우리 역사 속에는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의 사례들이 많이 존재한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의 눈을 통해 '역사속의 개혁' 순례를 떠나본다.

편집자

갑신정변의 주역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정변 당시 나이는 서른 넷, 요즘으로 치면 팔팔한 386이었다.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 때 안동 김씨의 핵심 김병기(金炳基)에게 양자로 간데다 스물 두 살 약관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김옥균은 굳이 정변에 목숨걸지 않아도 장밋빛 인생이었다.

스물 넷의 나이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도 마찬가지로서 13세 때 영혜옹주(永惠翁主:철종의 딸)와 결혼해 금릉위(錦陵尉)가 된 그는 신망높은 왕실 일가였다.

그러나 개화파라고 불렸던 그들 가슴속의 뜨거운 개혁의지는 그들을 정변이란 위험한 승부의 세계로 끌고갔다.

양반특권체제의 핵심이었던 이들의 스승은 뜻밖에도 중인들이었다.

조선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거대한 해일을 가장 먼저 감지한 계급이 중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신의 통역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청의 몰락을 목도한 중인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그 친구였던 의관(醫官) 유홍기(劉鴻基:유대치)는 '개화'만이 조선의 살길임을 확신하고 이를 전파시키려 했다.

중인신분으로 양반자제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난제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만나면서 풀렸다.

고종 3년(1866) 대동강에서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화공(火攻)으로 격침시켜 명성을 얻은 그는 고종 6년(1869) 한성판윤이 되어 귀경해서는 자신의 사랑방을 북촌 양반자제들의 학습장으로 제공하고 스스로 강의까지 맡았다.

봄날의 훈풍처럼 조선에서도 개화는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천대받던 승려출신 이동인이 1880년 9월 국왕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해 12월에는 외교를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고, 잇달아 60명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으로 파견되는 등 개화는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1882년 6월 발생한 임오군란은 그런 시대적 흐름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에 호응해 3천명의 청국군이 진주해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민비정권을 다시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김옥균이 "갑신일록"에서 '청당(淸黨)', '민당(閔黨)'이라고 표현한 민비와 그 일족들이 주도하는 친청 수구파의 세상이 되었다.

개화파가 이에 반발하면서 양자 사이의 갈등은 크게 고조되었다.

*김옥균 서른넷.박영효 스물넷

당초 개화파에 동조했던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온 1884년 5월 이후 수구파에 가담해 개화파를 억압하자 개화파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다

열세였던 개화파는 1884년 5월 청국군 1천500명이 베트남으로 이동한 데 이어 그해 8월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호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당초 개화파는 독자적인 정변을 모색했다.

미국은 말로만 개화파를 격려했으며, 일본은 김옥균이 1883년 6월 고종의 국채(國債)위임장을 가지고 국채를 빌리기 위해 도일했을 때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위임장이 가짜라고 허위보고했을 정도로 개화파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884년 10월 말 일본에서 귀임한 다케조에가 태도를 돌변해 돕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이제 우리나라 사세를 말하자면 그 형세가 잠시도 늦출 수 없다.

공사가 여기에 오기 전에 우리 당(黨:개화당) 사람들은 이미 결정했던 것이고 일본이 원조하고 않는 것은 본래부터 바라는 것이 아니다("갑신일록" 1884년 11월 25일)"라고 선을 그었으나 결국 150명에 불과한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들임으로써 갑신정변 최대의 아킬레스건인 외세의존 논쟁을 불러왔다.

1884년 12월 4일 밤, 민영익을 살린 공로로 광혜원(廣惠院:세브란스 의료원의 모태)을 설립하게 되는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미국인 알렌(H.N. Allen)은 살인사건이 났으니 급히 와달라는 미국공사의 전갈을 받고 우정국으로 달려갔다.

그는 "조선체류기(Things Korean)"에서 "급히 가본 결과 외국 대표단들과 조선 정부의 고관들은 피가 몸에 튀어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으며, 그날 저녁 연회의 주인인 민씨 왕자(민영익)는 동맥이 잘리고 머리와 몸 등 일곱 군데를 찔려 숨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라는 목격기를 남겼다.

갑신정변의 현장은 이처럼 처참했지만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가 발표한 개혁정강은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초유의 혁신적인 것이었다.

14개조의 개혁정강 중에서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권을 확립해서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이라는 두 개 조항만 들어도 그 혁신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개혁정강의 목표는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이었다.

*위험한 승부 3일천하로 비극

김옥균은 1881년 음력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위로부터의 개혁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현장을 목격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문제는 조선은 일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3일 후인 12월 6일 1천500명의 청국군이 공격을 개시했는데, 개화파에게 충격인 것은 민중들도 개화파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민중들은 개화파를 친일파로 보고 공격했다.

끝까지 국왕을 호종하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피살당했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남은 이희정, 김봉균, 신중모, 이창규 등 11명이 대역죄로 처형당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미국공사 후트가 실패 이유를 "대다수의 국민대중이 그들의 새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고, 또 동정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개화당에 가담했던 서재필은 "그 계획은 뜻했던 대로 실현되어 3일간은 성공한 것과 같이 보였으나 원세개(袁世凱)의 간섭으로 독립당의 3일몽(夢)은 또 깨어지고 말았는데 독립당의 계획에는 부실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큰 원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개혁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그를 추진할 주체세력, 그리고 민중의 지지가 필수조건이다.

갑신정변에는 비전과 주체세력은 있었지만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

개혁피로증이 만연한 오늘의 상황은 어떤가? 민중은 개혁주체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개혁주체가 서재필처럼 자성(自省) 대신 민중의 무지몰각을 개탄하고 있는가?

* '부르주아 혁명단계' 北, 南과 달리 평가

한국에서는 갑신정변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갑신정변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가 필요한데, 갑신정변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발전 5단계설에 따라 사회주의 체제 북한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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