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포럼-재신임과 역사속 양위파동

입력 2003-10-14 11:36:29

지난 주말 전국이 혼란 상태로 변했다.

현재 집권하고 있는 대통령이 그 자리를 걸고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다니, 직업 정치인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대통령직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이 터져 나왔고, 그 말이 우스개처럼 돌던 그 때만 하더라도 이런 사태까지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에도 '왕 노릇 못해 먹겠다'고 내뱉은 임금이 여럿 있었다.

그것이 푸념을 넘어서서 직접 '신임'을 묻는 정황으로 나타나 정국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조 태종이었다.

그는 무려 네 차례나 선위(양위)파동을 빚어냈다.

신하들 앞에서 '왕 노릇 못해먹겠다'고 선언하고 세자에게 넘기고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신하들은 무슨 날벼락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것이 거듭되면서, 왕이 정말로 양위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일부 세력이 새 군주의 윤곽을 잡으려다가 제거되었다.

네 번이나 되풀이된 태종의 양위파동은 결국 공신그룹과 원경왕후 척족들을 제거하여 개국초 강력한 군주권을 확보하였다.

측근인물을 정리하여 새판을 짜서 권력을 확고하게 만든 것이다.

선조도 걸핏하면 왕 노릇 못하겠다고 뱉어 놓은 왕이었다.

그리고 영조도 양위를 운운하면서 세자에게 통치권을 맡겨 놓고 정국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조나 영조는 태종과 성격이 달랐다.

태종이 개국초에 정치개혁과 국권 안정을 목표로 삼아 강력한 군주권을 확보하려 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밀고 나가려는 일에 신하들이 제대로 받쳐주지 않는다는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왕의 국정 운영의지를 신하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추진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신임' 문제로 불거진 것이다.

물론 왕이 신하를 해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왕권이 일방적으로 신권(臣權)을 짓밟기도 힘들었고, 실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국왕이 자신의 '신임' 문제를 내건 근본 이유가 신하들을 정리하고 견제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양위파동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운영하는 데 성공한 왕들은 정략에 뛰어난 인물이고, 또 집권기간도 길었다는 점이다.

노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재신임'을 묻기로 하였다.

신임이라는 말이 믿고 맡긴다는 뜻이고, 재신임이란 대개 임기를 끝낸 뒤에 다시 한 번 더 믿고 맡긴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임기중이지만 나머지 임기에 대해 믿고 맡겨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를 믿고 5년이란 계약기간을 정해 국정운영권을 맡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은 계약기간 동안 국정을 계속 맡아도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노대통령의 '재신임' 요구는 난관을 정면으로 치고 나가는 극약처방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노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국정운영권을 넘겨받자마자 '코드'가 맞는 인물만으로 개혁드라이브 정책을 밀고 나가다가 한계에 부딪혔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 현상을 방기하면서 진보에게만 일방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였지만, 그의 무리수와 더불어 토대의 부정직성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마저도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양극화된 대립구도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조정하지 못하자, 양측 모두로부터 지원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여당도 없어지고, 지원하던 시민단체들도 등을 돌렸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인물마저 하나둘씩 부정이란 거적을 덮어쓰고 쓰러졌으니, 어디 둘러보아도 손 내밀어 그를 도와줄 세력이 없다.

그러므로 새판 짜기를 통해 친위세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국정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그래서 정치권을 환골탈태하여 새판을 짠다면, 역사속 양위파동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조선조 국왕의 양위파동이 군주권과 신료권(臣僚權)의 파워게임이었다면, 지금의 '재신임' 소동은 국민을 담보로 정권의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런데 비록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그 동안의 잘못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가 어떻게 나더라도 그가 줄곧 탓하는 언론이나 보수세력이 아니라 조화 속에 개혁을 엮어내지 못한 노대통령 자신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극약을 소화해내야 할 국민의 고통을 헤아린다면, 차라리 합리적 보수와 건전한 진보를 조화시켜 나가는 편이 훨씬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된다.

김희곤(안동대교수.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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