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이던 지난 15일 오후 4시쯤 대구 동촌 금호강 둔치. 수백명의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놀이디자인연구소, 미디어교육연구소, 전교조 대구지부, 대구교대 총학생회 등이 함께 마련한 대보름 어린이 민속놀이 한마당. 연을 날리거나 투호놀이, 널뛰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는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넘쳐났다.
평소 주인(?)이던 노인들은 자리를 내주고 한쪽에 물러나서도 "허허, 녀석들…"하며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놀이마당이 끝나자 점수에 따라 자그마한 시상식도 열렸다.
등수를 다투는 어린이들의 고함은 참가한 모든 가족들이 원을 만들고 도는 강강술래의 메아리로 이어졌다.
간간이 찬바람이 불고 날도 어둑해졌지만 깔깔거리는 소리, 고함소리, 노래소리가 금호강변을 가득 메웠다.
달도 가려 대보름 같지 않은 밤, 그래도 쥐불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의 가슴 속에는 보름달보다 훨씬 더 큰 달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요즘 어린이들의 문화가 TV에서 시작해 컴퓨터로 끝난다고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나 포트리스 같은 게임과 채팅에 중독 증상을 보인다고 하지만, 전통놀이의 재미를 잊었다고 하지만, 어린이들은 쉽게 빠져들고 쉽게 즐거워했다.
밖에서 뛰어노는 모습은 20년전, 30년전, 부모 세대들의 어린날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날 행사를 마련한 사람들은 '어린이 문화연대'(cafe.daum. net/ccnet)라는 이름으로 모인 지역의 어린이 운동가들. 초등학교 교사와 예비교사들,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어린이 노래패 운영자, 체험학습 지도자 등 어린이와 관련된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구교대, 강북 등에서 어린이날 행사 실무를 맡아오며 부지런한 학부모들에겐 이미 알려진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대보름을 맞아 전에 없던 달맞이 행사를 준비한 것은 어린이날이나 돼야 온전히 자신들만의 시간과 놀이공간을 가질 수 있는 어린이들에게 가급적 자주, 가까운 곳에서 몸을 던져 놀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아니라 놀이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송종대씨는 "지금까지 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의 문화가 거의 없었다"고 잘라말했다.
어린이들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변변한 공간은커녕 기회조차 없을 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도 없다는 것. 임성무 도원초교 교사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일제에 눌린 조선에 눌리고, 어른들에 눌린 존재"라고 방정환 선생이 표현하던 어린이들은 지금도 성적에 눌리고, 학원에 눌리고, 부모들의 과욕에 눌려 있다는 것.
주위의 마땅한 후원도 없이 팔다리 품을 팔아 이날 처음 행사를 연 이들이지만 표정은 내내 밝았다.
당장은 어렵지만 참가한 어린이와 부모들의 밝은 표정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 "미리 만들어온 연 100개와 현장에서 연 만들기를 할 수 있는 재료 50개분을 준비했는데 금새 동났어요. 수익금으로 행사 경비는 근근히 메우겠다는 안도감보다 연을 구할 수 없어 아쉬워하던 어린이들에게 미안함이 더 컸습니다."
임 교사는 "쥐불놀이를 하고 있는데 퇴직 공무원이라는 어르신 두 분이 찾아와 손을 잡으시며 너무 고맙다, 눈물이 다 난다고 칭찬해 주셨다"며 "어린이들과 부모, 행사를 돕는 사람들 모두의 즐거운 얼굴을 보며 힘들어도 참 잘 시작했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의 아쉬움은 하나.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아 수백개의 연이 하늘을 나는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어린이들이야 줄을 잡고 달려야 날아오르는 연이라도 재미있어만 했지만.
행정당국에 대한 섭섭함은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부분이다.
"시청이든 구청이든 어린이 행사라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이날 하면 되지 않느냐는 정도죠. 대구시에는 어린이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조차 없어요. 지역의 어린이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계획도, 기획도 전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요".
쉽잖은 여건이지만 '어린이 문화연대'는 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올해중 수차례의 크고작은 어린이 마당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다.
어린이날은 물론 어린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날, 잊지 말아야 할 날에 잊어서는 안 될 전통놀이와 문화를 중심으로 어린이들이 주인되는 자리를 열겠다는 것. "그래도 자녀들에게 어떤 걸 해줘야할지 고심하고 찾아다니는 부모들이 많다는 게 큰 힘이 됩니다.
어린이, 학부모들과 함께라면 작은 자리라도 큰 빛이 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李 대통령 "돈은 마귀, 절대 넘어가지마…난 치열히 관리" 예비공무원들에 조언
尹 강제구인 불발…특검 "수용실 나가기 거부, 내일 오후 재시도"
李 대통령 "韓 독재정권 억압딛고 민주주의 쟁취"…세계정치학회 개막식 연설
정동영 "북한은 우리의 '주적' 아닌 '위협'"
정청래 "강선우는 따뜻한 엄마, 곧 장관님 힘내시라" 응원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