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언론 키우자

입력 2003-02-14 13:59:11

지난달 21일 지방분권운동본부(대표 김형기)는 대통령직 인수위와 가진 간담회에서 지방언론 육성책에 대한 정책 자료를 제출했다.

분권운동본부가 이날 내놓은 지방언론 육성안의 핵심은 △지방언론 건전지원육성법 제정 △부실·무능력 신문사의 자율정비를 위한 장치 마련 △전국지 상위 3사의 신문시장 독과점(75%) 규제 등이다.

분권운동본부측이 내놓은 정책 자료는 한편으론 지방 신문이 처한 '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진단서'이기도 했다.

69개에 이르는 지방 신문사 중 지난해 경영상 필요한 순이익을 낸 곳은 매일신문(40억원)을 포함, 서너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다수 신문사는 도산 위기에 빠져 있거나 실제 부도 상태에 있다.

지방 신문이 이처럼 몰락한 원인은 여러가지다.

언론학자들은 지방신문이 안고 있는 문제로 90년대 이후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지방이란 '우물' 안에 갇혀 신문의 질적 수준을 높이지 못해 경쟁력을 상실한 것과 부실한 경영 등을 꼽는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건전한' 지방지까지 위협하는 서울 소재 거대 3사의 자본을 앞세운 시장 장악과 '독자없는' 부실 지방신문이 가져다 준 왜곡된 환경이라고 지적한다.

김영호(전 세계일보 편집국장)씨는 "지방 유력지들이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직접적인 원인은 일부 중앙지의 증면 때문"이라며 "중앙지가 90년대 초 이후 50면이 넘는 신문을 찍어내자 지방지들도 시장 방어 차원에서 고가의 윤전기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윤전기 도입 후 IMF가 터지면서 폭등한 리스료 부담 등으로 재정이 부실해지기 시작했다"며 "여기에 지방지 난립도 지방 신문 시장을 더욱 열악하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방 신문 시장을 둘러싼 파행적인 환경은 지방 광고 시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95년 이후 전국 장악을 목표로 경쟁적으로 지방 인쇄공장을 설립한 뒤 고가 경품으로 신문 판매시장을 흐려놓은 서울 소재 거대 신문들은 수년 전부터는 지방 광고시장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즉 분공장을 통해 지방판을 찍어내면서 지방 유력지에 비해 턱없는 가격으로 광고 유치전에 나서고 있는 것.

"거대 신문들은 대기업 광고 독식만으로도 부족해 유력 지방지의 30~40% 가격으로 지방 광고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판매 뿐 아니라 지방 광고시장까지 혼탁해졌다". 지방지 관계자들은 거대 신문의 이러한 불공정 행위가 갈수록 정도를 더해 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부실 지방지까지 가세하면 광고 시장은 '시장 논리'가 사라진다.

지역 모 주택업체 관계자는 "광고 효과도 없는 신문들의 횡포 때문에 솔직히 광고 내기가 겁난다"며 "한두개 신문에 광고를 내면 말 그대로 벌떼같이 달려들어 광고를 요구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업계 특성상 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어 협력 업체들까지 동원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광고를 할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이 탓에 일부 업체는 아예 신문 광고 자체를 포기하는 부작용도 속출한다.

관공서에 가면 일반 시민들은 이름조차 생소한 '신문'들이 넘쳐난다.

일반 독자가 아니라 관공서만을 상대로 하는 이른바 '신종 관변지(?)'들이다.

최소한의 신문 창간 조건만 채운 뒤 발행된 신문을 영향력 있는 관공서와 기관·단체 등에만 배포하는 일부 지방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군소 도시로 내려갈수록 심각해진다.

경북 북부 지역에 근무하는 매일신문의 한 기자는 "웬만한 군에는 지방지 주재기자가 7, 8명에 이른다"며 "이들 중 대다수는 광고와 신문 판매 수입에 따라붙는 수당을 월급 대신 받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들은 취재보다는 광고 수주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또 몇년 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사이비 언론에 대한 단속 의지를 내비치자 본사에서 서류상으론 월급을 지급한뒤 신문판매와 광고 할당량을 월급만큼 대폭 올리는 편법이 성행하고 있다.

군·소 도시에 넘쳐나는 부실 지방지 기자들은 또다른 폐해를 낳기도 한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지역 내에서 각종 업체를 직·간접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즉 '기자'란 직함을 본업을 유지하기 위한 '방패막이'나 '압력 수단'으로 삼는 경우다.

실제 신생 지방지가 주재기자를 모집하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30, 40대 자영업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곤 한다.

또 경영 악화로 신문 발행이 어려워지면 월급 없는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거둬 신문을 찍어내는 웃지 못할 경우도 발생한다.

지방분권운동본부가 '지방언론 육성책'을 대통령 인수위에 건의한 배경에는 이러한 환경들 탓에 지역 발전에 필수적 존재인 건전한 유력 지방지의 미래까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기자협회와 언론학계를 비롯, 시민단체들까지 '지방 언론 활성화'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지역언론육성지원법 시안을 만든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지방언론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도 불가능하다"며 "지나치게 왜곡된 지방 신문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맞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지방 언론 육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줄곧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계 안팎에서는 서울 소재 거대 신문의 불공정 시장 행위에 대한 개선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지만 지방지 지원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자칫 정부의 지원책이 부실 지방지의 양산을 부채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언론학부)는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지원대상 선정기준 마련과 이를 다른 목적으로 썼을 때의 처벌조항이 있어야 한다"며 "편집권이 독립되고 지역발전에 기여도가 높은 언론을 선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협기자 ljh2000@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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