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포지션이라고 화려하지 않겠나마는 삼성의 외야진 역시 알토란같은 선수들로 수두룩했다.
장효조, 홍승규뿐만 아니라 허규옥, 장태수도 빼놓을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허규옥 역시 홍승규처럼 장효조에 밀리는 상황을 겪기도 했지만 재능은 장효조에 못지 않았다. 공·수·주 3박자를 고루 갖췄다는 면에서 오히려 장효조를 능가하는 측면도 있었다. 허규옥은 경북고와 대구상고, 양대 산맥의 그늘에 가렸지만 빼어난 선수들을 보유, 만만찮은 면모를 보였던 대건고 출신이다. 대건고는 허규옥 권영호 장태수 원민구 등 기억할 만한 선수들을 배출했다.
삼성 원년 멤버인 그는 1, 2번을 치며 공격 첨병 역할을 맡았으나 무릎 부상 이후 부진에 빠진 뒤 83년 장효조의 입단으로 배번을 넘겨 주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84년까지 헤매던 그는 혹독한 겨울 훈련을 거친 후 85년 시즌부터 87년 시즌까지 3년 연속 100안타 이상을 치는 등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성기였던 세 번의 시즌에서 허규옥은 타격 4~9위, 도루 4~5위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85년 전기리그 막바지 해태와의 경기에서 김봉연의 중전 안타를 빠뜨려 3루타로 만들어준 뒤 팀이 패배한 경기는 그가 잊지 못하는 경기이다.
당시 정동진 코치가 새벽4시까지 술을 사주며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해줬다.
허규옥은 장효조와 함께 89년 롯데로 옮긴 뒤 2년간 뛰다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 2년간 그라운드를 누비다 92년 은퇴했다.
89년 올스타전에서는 결승 홈런을 때려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은퇴 후 사업 일선에 뛰어들었다.
장태수는 또 어떤가. 그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팀 공헌도가 높은, 한결같은 선수였다.
허규옥처럼 공·수·주 3박자를 갖췄고 그 중 수비는 단연 일품이었다.
아마시절 경리단에 입단하지 못해 현역으로 복무하면서도 배트를 놓지 않았던 그는 입단 첫해인 82년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다.
3할3푼6리로 백인천, 윤동균에 이어 타격3위를 기록하며 베스트10에 뽑히는 기쁨을 맛봤다.
이후 그는 82년 만큼 타격이 날카롭진 않았지만 2할7, 8푼대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외야 자리를 지켰다.
외야수의 타율이 3할을 넘지 못한다면 미흡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는 탁월한 수비력으로 그의 존재를 알렸다.
특히 가운데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는 중견수 수비는 국내 최고였다.
그는 플레이에 비쳐진 이미지와 달리 입담이 좋아 '장소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92년까지 선수로 묵묵히 뛴 뒤 94년부터 삼성 코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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