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현장-(5·끝)중국속의 한국인

입력 2003-02-07 09:42:11

베이징(北京) 공항에서 시내쪽으로 차를 타고 20여분 정도면 도착하는 왕징신청(望京新城). 진눈깨비라도 올 듯 잔뜩 흐린 날씨 속에 20,30층짜리 고층 아파트들이 자욱한 겨울안개 너머로 신기루처럼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베이징의 동쪽에 위치한 베이징 최대 규모의 이 아파트단지는 최근 몇 년사이 한국인들이 밀집, 바야흐로 '코리아타운'을 형성해 가고 있는 곳이다. 이훈복(57·한산상무 대표) 재중국한국인회 회장은 좬지난 1998년 무렵부터 베이징에서 사는 한국인 상사주재원이나 자영업자들이 서서히 왕징(望京)지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해서 현재 줄잡아 2천여 가구, 1만명 가까운 한국인이 이 아파트단지에 사는 것으로 추산됩니다고 말했다.

이 정도 숫자라면 단지내 전체 1만여가구 중 5분의 1 이 한국인 가구라는 것. 이곳의 중국인 주민들은 대부분 베이징에서 중산층 이상의 여유있는 계층의 사람들이다.

차림새 등에서 일반 중국 서민들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한 주민은 영화 '와호장룡'의 주연 여배우 장즈이도 이 아파트촌에서 사는 것 같다고 귀띔해주었다. 단지내 왕징시위안(望京西園)에서 한국상품만 취급하는 한국성(韓國城)의 간판에는 한국음식점인 전주관, 란제리코너인 비비안, 수지미용실, 음반점, 노래방, 하나마트, 조은부동산, 안경점, 당구장, 십자수점, 찜질방까지 26개의 상가들이 들어있다.

'해 뜨는 집'이라는 상호의 한 스낵코너에는 순대와 족발, 쫄면 등 한국음식을 팔고 있다. 벽에는 '얼큰한 시골맛 순대국밥' 이라든가 '정말 맛있는 족발'같은 쪽지들이 붙어있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중국으로, 중국으로, 한국인들이 몰려오고 있다. 사업하기 위해, 또는 공부하기 위해서 중국에 오거나 아예 중국 대륙에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인들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한국산 대중문화나 음식 등과 함께 나타나는 또 하나의 한류(韓流)이다. 지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10주년이 지나면서 한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3대 교역국이 됐을 만큼 경제적 긴밀도가 커졌고, 인적 교류는 12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재중국한국인회(회장 이훈복)의 지역별 진출 한국인 수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 6월 현재 중국 전역에 퍼져있는 한국인은 약 25만명 정도. 주로 한국기업체가 많이 진출해 있는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를테면 산둥(山東)성의 칭다오(靑島)에는 5만 명 정도, 선양(沈陽)이 있는 랴오닝(遼寧)성에 약 3만명, 옌볜(延邊) 등 지린(吉林)성에 2만8천명. 베이징에 약 2만5천명, 톈진(天津)에 2만1천500명, 그 외 상하이(上海) 6천명, 헤이룽장(黑龍江)성 7천명, 저장(浙江)성 1천500명, 광둥(廣東)성 1천500명, 장쑤(江蘇)성 500 명, 기타 지역 2만9천명 등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중 상사 주재원이나 투자진출 사업가 및 그 가족들이 15만 명 정도, 유학생이 5만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 수교 이후 초창기에는 한국과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북3성(吉林 遼寧 黑龍江)에 몰렸으나 지금은 경제발전지역인 상하이 등 동남부쪽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칭다오,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각지에서 속속 코리아타운이 들어서고 있다.

이중 수도 베이징에서는 2개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고 있다. 하나는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 북쪽의 슈에유엔루(學院路)에 있는 오다오커우(五道口). 대학가의 특성에 따라 주로 유학생들이다.

또하나는 동쪽의 주택지역에 있는 아파트촌인 왕징신청으로 유학생 외 일반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인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화쟈띠(花家地)가 바로 인근에 있고,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야윈춘(亞運村) 아파트단지에도 한국인들이 적지않게 살고 있어 왕징을 중심으로 하여'중국 속의 한국인촌'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곳 왕징지역은 마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가처럼 '작은 한국'이다. 어디서든 한국인을 만나게 되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옷을 입고 한국식 여가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최근에는 한국인 자녀들을 위해 중·고 과정을 가르치는 한국국제학교가 설립됐고 한국인을 주고객으로 하는 병원도 생겨났다고 한다. 중국말을 못해도 기본적인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몰려오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21세기 경제강국으로의 비상을 노리는 '기회의 땅' 중국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중국을 공부하여 명실공한 중국통이 되기 위해서이다. 특히 유학생 경우 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이 대부분이고 고등학생은 극히 소수였던데 비해 최근에는 초·중생으로까지 연령층이 낮아져 유학생의 수적 증가는 갈수록 가파르게 높아질 전망이다.

게다가 상사 주재원으로, 또 유학생으로 중국에 온 사람들 중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비록 생활수준이 한국보다 낮고 좀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점들은 있지만 한국에서처럼 인간관계와 업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고,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데서 오는 자유로움이 그들을 중국땅에 정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서구 국가의 교민들처럼 피부색이 다른데서 오는 이질감이 없는 것도 큰 메리트. 10년전부터 베이징에서 요식업을 시작, 사업가로 뿌리내리고 있는 김천호(51·S&P companies 대표)씨는 가끔 한국에 출장갈때면 우리나라가 오히려 외국처럼 느껴져 빨리 돌아오고 싶어집니다. ' ' 중국에서 살다 이곳에 뼈를 묻을 작정입니다 '고 말했다.

베이징살이 6년째인 김 사장의 부인 이해경(45)씨도 ' 40년 넘게 산 서울보다 오히려 북경이 편하다면 어떻게 설명이 될지… ' 라면서 ' 중국인들의 대륙적 기질인 너그럽고 여유있는 삶의 태도에 늘 감탄하게 됩니다 '고 덧붙였다.

중국이 좋아 중국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중국인에 대한 멸시, 고성방가,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안하무인격 태도 등 일부 '추한 한국인들'로 인해 이웃 중국인들의 원성을 사는 예도 적지않다고. 의식있는 교민들은 중국의 외양만 보고 경솔하게 판단한다면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중국의 현실과 문화를 인정하고 동반자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중국인들의 '좋은 친구(好朋友)'가 될 수 있으며, 중국사회에 건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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