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본 21년 라이온스-장효조

입력 2003-02-06 13:18:57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인 1992년 9월20일자 신문의 체육면에 '불멸의 3할 타자 장효조 은퇴'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번뜩이는 천재성이 온 몸에 흘러넘쳤던 타격의 달인이 자신의 땀과 눈물이 어렸던 그라운드를 떠난 것이다.

프로 생활 10년간 언제나 정상에 서있던, 이 개성 강한 천재 역시 그의 고교 후배였던 김시진처럼 실의를 겪기도 했다.

83년 삼성에 입단한 그는 바로 그 해 3할6푼9리의 타율로 수위타자가 됐다.

신인왕 수상이 당연했으나 엉뚱하게 타격4위에 그친 박종훈(OB)이 신인왕이 됐다.

84년 3할2푼4리의 타율로 4위에 머무르며 잠시 부진(?)을 보였던 그는 85년부터 87년까지 3년 연속 3할3푼~3할8푼대의 높은 타율로 3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다.

매년 MVP 후보였던 그는 5년만인 87년 MVP에 선정된다.

지독히 불운했던 상복도 그의 실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87년 전기 시즌에는 4할1푼9리의 경이적인 타율을 기록, 82년 백인천이 세웠던 시즌 최고타율(4할1푼2리)을 갈아치울 듯이 맹타를 휘두르기도 했다.

등번호 10번을 단 장효조는 173cm, 72kg의 작은 체구지만 타석에서 강한 기를 뿜어냈다.

최동원이 역동적인 투구폼과 강속구로 타자들을 주눅들게 했다면 좌타석에 선 장효조는 빈틈없는 타격 자세와 강렬한 눈매로 투수들을 위축시킨 후 온 몸을 이용하는 타격으로 어디든 안타를 날렸다.

타석에서 공을 흘려보낸 후 심판 주위를 한바퀴 돌며 다시 타석에 들어설 때의 당당한 모습은 거만하기까지 했다.

현역인 양준혁이 그의 팬들로부터 '위풍당당'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장효조의 당당한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그러나 장효조는 심판에 대해 거칠게 항의하는 경우가 잦아 '매너가 나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승부에 대한 집념과 투지가 대단했던 그는 심판에 대한 항의가 경기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정작 자신은 심하지 않다고 생각, 세간의 평가를 억울해 했다.

또 그는 홍승규 등 후배들이 만만치 않자 알게 모르게 경계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87년 최고의 해를 보냈던 장효조는 88년 1월 트레이드 대상으로 지명돼 파문을 일으킨다.

자존심이 칼날 같았던 장효조를 불편해했던 삼성 구단은 1급 투수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트레이드에 나섰으나 최종적으로 성사되지 않아 대소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박영길 감독이 구단에 대해 잔류를 요청했으며 장효조의 후원회도 구단을 설득했다.

트레이드 파동의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장효조는 88년 시즌 3할1푼4리(8위)에 그쳤으며 결국 89년 김용철과 맞바꿔 롯데로 옮기게 된다.

자신의 명예가 손상됐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의기소침했으나 89년 3할9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후 90년 처음으로 2할대(2할7푼5리) 타율로 떨어진 뒤 91년 3할4푼7리로 명예를 회복했다.

자란 곳은 대구이지만 태어난 곳은 부산인 그는 고향팀 롯데에서 코치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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