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검찰의 추락

입력 2003-02-06 13:25:24

지난해 11월 89세로 워싱턴에서 작고한 미국 CIA '리차드 헬름스' 전(前)국장은 냉전시대 미국 첩보전의 전설적 인물로 사후(死後)에도 미국민들이 "미국은 위대한 애국자를 잃었다"고 평가를 내릴 정도로 그 명망이 지대했다.

그가 이렇게 평가를 받는 건 뭐니뭐니해도 닉슨대통령이 연루된 워터게이트사건에 대한 FBI의 수사가 점차 닉슨을 압박해 들어오자 그 수사를 막아달라고 그에게 간청을 했지만 헬름스 당시 CIA 국장은 이를 과감하게 뿌리친 이력도 한몫하고 있다.

사실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도 아닌 정보기관의 장(長)인 그가 현직 대통령의 애원을 뿌리치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국가기밀을 많이 아는 만큼 그에게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고 대통령이 맘만 먹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수도 있는 게 CIA의 생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CIA의 이런 정치권과의 필연적인 유착이 결국 CIA를 약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는 부단하게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CIA를 벗어나게 하는데 진력했고 그 하이라이트가 '닉슨의 애원'을 거부한 것이다.

그로인해 결국 그는 이란의 팔레비왕 치하 대사로 경질됐고 그 몇달후 닉슨도 사임했다.

목숨과 맞바꿀수 있는 그의 용기가 미국의 역사를 바꾼 워트게이트에 얽힌 일화(逸話)로 전해지고 있다.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일본의 검찰이 국민적인 신뢰속에 오늘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것도 비슷한 시기(지난 73년) 동경 지검 특수부 검사들의 용단에서 비롯된 것도 잘 알려진 일본 검찰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이다.

미국 록히드사 뇌물사건의 '몸통'으로 수사선상에 포착된 당시 다나카 현직 수상을 정치권의 엄청난 압력을 뿌리치고 당시의 젊은 검사들로 구성된 수사팀이 과감하게 구속함으로써 전국민들의 찬사속에 일본 검찰은 전후내내 '정치권의 시녀'에서 일약 감히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추상 같은 검찰권'을 쟁취, 오늘에까지 확고히 견지하고 있다.

자민당 일당독재의 위세나 정경유착이 심한 일본정계의 풍토에서 정치권력에 눌려있던 검찰지휘부의 타협 압박을 뿌리치기가 실로 어려운 젊은 검사들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이룩할 수 없는 일본검찰의 일대 쾌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뒤에는 전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고 그걸 굳건하게 뒷받침하는 언론이 그 원동력이 됐음은 말할나위가 없다.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汚名으로 점철된 우리 검찰도 지난해 1월 이명재 검찰총장이 이례적으로 재야에서 발탁되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결정적인건 역시 '대통령의 두아들'을 구속하면서 이젠 뭔가 검찰이 제자리를 찾는듯했다.

물론 이용호 게이트를 다룬 특검의 소산이었지만 신승남 검찰총수 등 수뇌부를 사법처리하는 한편 신 총장의 부탁을 들어준 일선검사까지 부당한 명령에 복종했다는 이유로 징계조치도 불사하면서 안팎 정지작업을 다져 검찰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뒷면에선 당시 송정호 법무장관이 청와대간부들의 외압을 뿌리친 용단과 대통령 아들 구속직후 이명재 총장의 대통령에 대한 예우차원의 사직서가 반려되는 뒷마무리까지 깨끗하게 수습되면서 광복이후 지속돼온 '시녀검찰'이 이젠 마감되려나 했었다.

물론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심통'이란 별명의 심재륜 고검장의 항명파동에 젊은 검사들이 동조하면서 심상찮았던 '검찰동요'가 청와대로 하여금 물러서게 할 수밖에 없게 했고, '이종왕 검사'의 수사팀 사퇴용단도 검찰권 회복에 견인차가 되기도 했다.

만약 이번 '대북(對北)송금의혹'에 대한 검찰수사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우리 검찰은 '확실한 도약'을 할수 있었을 것이란게 모든 국민들의 염원이자 믿음이었다.

'위기'는 '기회'란 말이 참으로 실감나는 그 찬스를 검찰은 그 지휘부가 스스로 일거에 까뭉개 버리면서 전 국민들의 세찬 비난과 함께 크나큰 실망을 떠안겨 버렸다.

이번 검찰의 수사유보 결정을 놓고 일찍이 '검찰의 자살(自殺)'이라는 혹평을 들어보지 못했고 직무유기라는 전국민들의 원망이 이렇게 거세게 나오는 경험을 해본적이 없다.

대검찰청 홈페이지 '국민의 소리'에 "현 우리의 정치상황에선 검사의 용기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요, 사시(司試) 합격자 1천명 시대에 검사도 가족을 거느린 가장(家長)"이라는 현실적인 글이 언뜻 보였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검찰권을 이젠 경찰에 넘겨주라"는 모욕적인 언사가 쏟아지는 세태를 검찰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檢事'의 명패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희생과 용기'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검찰권이 그저 얻어지는게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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