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점 주인 박신규씨

입력 2002-07-15 14:01:00

이제는 추억거리가 되어버린 양화점(洋靴店). 20~30년전 우리 생활주변에서 눈에 익숙했던 것이 양화점이었지만 이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제법 화려한 쇼 윈도와 각양의 구두가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브랜드화의 매장들은 점점 더 커지고만 있다.

대구 중구 봉산문화거리 허리쯤에 자리잡은 동아양화점(424-7064). 주인 박신규(61)씨는 40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다. 3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는 조금은 유행이 지난 구두들이 살짝 먼지를 덮어쓴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한쪽 골방에서는 박씨가 샌들 밑창에 접착제를 바르는 등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다.

박씨가 고향 안동을 떠난 대구로 온 것은 전쟁의 상흔이 여전했던 1950년대말. 그의 나이 15세 무렵이었다. 농사일밖에 모르던 그가 대도시에서 처음 접한 일은 바로 제화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양화점을 운영했던 사촌 형님의 권유를 받고 시작했다.

1~2년이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기술이었지만 박씨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오갈데 없는 박씨가 주인집에서 숙식하며 기술을 배우다보니 잔심부름과 허드렛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월급도 없었고 일년에 고작해야 목욕비 3번정도 받은 기억이 전부다.

어렵사리 배운 기술로 20대 후반 나이에 중구 남산동에 처음 가게를 열고 독립했다. 내건 간판이 현재의 '동아양화점'이다. 한 달 평균 100결레를 만들 정도로 일감도 많았다. 단골도 많았고, 일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무렵 결혼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브랜드화가 늘어나면서 양화점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70년대에는 반월당에서 영대로터리까지 양화점만 해도 20군데가 넘었어. 손님들이 점차 브랜드화로 눈을 돌리면서 하나둘씩 문을 닫고 이제 남은 곳은 하나밖에 없어. 다른 사업으로 전업해 돈을 번 사람도 있고, 더러 아파트 경비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도 있지".

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지난 93년 봉산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그는 별 재주가 없어 여전히 구두를 만들고 있다. 재단이나 미싱은 다른 전문업체에서 가져오지만 나머지 작업은 전부 박씨가 손으로 해낸다.

요즘은 여름철이라 더더욱 일감이 없다. 하루 한켤레의 주문도 받지 못하는 날도 많다. 수선이라도 밀리는 날이면 하루 꼬박 만들어봐야 한 켤레도 못 만들 때가 있지만 그의 수중에 떨어지는 수공비는 고작 3만8천원이 전부다.

수입이라고 해봐야 그저 먹고 사는 수준. 봉산동 주민들과 화랑가 사람들이 더러 주문하기도 하고, 옛날 남산동 시절 단골들이 찾아와 주문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가 되어서도 이 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일찌감치 문 닫고 다른 길 찾아 나섰기 때문이지. 요즘 30, 40대 젊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규모있게 한다고 하지만 이제 우리 나이엔 이 일도 힘에 부쳐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박씨는 그나마 주문이 있는 날이면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도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연다. 주문시간에 맞추느라 부지런히 망치를 두드리지만 박씨의 무심한 표정에는 지나간 추억만이 아련히 묻어날 뿐이다.

서종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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