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를 다지면서 부르는 땅다지기 소리
옛날사람들은 하늘과 땅 앞에서 겸손하였다. 하늘을 섬기고 땅을 다지며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따라 살고자 했다. 하늘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우러르고 섬겼지만, 땅은 현실적으로 딛고 있는 공간이므로 함부로 요동치지 않도록 다지며 살았다. 지신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관념적으로 밟아 누르는 풍물굿을 하는 것이 지신밟기 전통이라면, 현실적으로 땅이 쉽게 허물어지거나 토대가 내려앉지 않도록 단단하게 다지는 공동작업이 땅 다지기 문화이다. 지금 다음 대선을 앞두고 민심 다지는 일에는 관심 없이 여야 기싸움이 한창이다. 대선에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도 표 훑기 하느라 벌써부터 대단한 공약까지 버젓이 내놓는다. 말로만 한다면 뭣인들 못할까. 땅 다지기 소리를 들으면서 표 다지기 슬기도 본받아야 할 터이다.
어기여차 지경이요
번쩍 들었다 쾅쾅 노소
없난 신명을 절로 내면
하나 둘만 하지를 말고
지경 닦난 군방님네
소리가 적어서 아니 돼요
무정세월 가지를 마소
아까운 청춘 다 늙어가네
가만 가만이 다져를 주소
청학이 한 쌍 묻혔으니
날개를 다칠까 하옵니다
백학이 한 쌍 묻혔으니
가만 가만이 다져를 주오
안성 사는 신천선 할아버지 소리이다. 집터를 다지며 부르는 소리인데 지경소리 또는 지점소리라고도 한다. 저수지를 막고 둑을 다지거나, 논을 만든 다음 논바닥의 흙을 다질 때에도 이 소리를 부른다. 지역에 따라 무덤 다지는 소리를 덜구소리, 집터 다지는 소리를 달개소리라고도 한다.
일노래의 성격상 앞소리꾼은 일을 지휘하고 일꾼들을 격려하는 구실을 감당한다. 바위나 큰 나무토막에다 줄을 매어두고 여러 사람들이 일시에 힘껏 잡아당겨 위로 올렸다가 줄을 놓아서 땅을 다지는데, 제각기 힘을 써서는 소용이 없다. 노래에 맞추어 힘을 써야 비로소 무거운 바위도 가볍게 들어올리고 일의 신명도 난다. 따라서 앞소리 사설은 높이 번쩍 들었다고 힘차게 쾅쾅 놓으라고 이른다. 그러나 신명이 과도하면 위험하다. 무거운 물건을 높이 들어올려서 땅을 짓찧는 일이므로 자칫하면 탈을 낼 수도 있다. 가만 가만 다져 달라고 들뜬 흥을 가라앉힌다. 땅 밑에 청학과 백학이 한 쌍씩 묻혔다는 은유가 걸작이다. 높이 날아오를 학의 날개를 다칠까 가만가만 다져 달라는데, 누가 함부로 날뛰겠는가.
어허여루 딸구야
이 딸구로 다지서로
우리 저수지 물을 실어
신농씨 본을 받아
농사짓기로 힘을 씨자
이 방아가 누 방안고
강태공이 조작방아
저나새나 찡은 방아가
빈방아만 찡었구나
거제도 사는 양또순 할머니의 딸구소리이다. 거제도는 원래 돌이 많은 곳으로, 처음 만든 논이나 오래된 논에는 물이 잘 빠져 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이에 논바닥을 다져서 물이 밑으로 쉽게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달개질을 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를 이 고장에서는 '딸구소리'라 하는 것이다. '딸구질'로 땅을 다져서 저수지처럼 논에 물을 충분히 실어 담아서 신농씨 본을 받아 농사에 힘을 쓰자고 이른다. 딸구질 하는 행위는 마치 방앗공이로 방아확을 내리찧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논바닥을 다지는 일을 방아찧기에 견주어 노래한다. 그러나 열심히 짓찧어봐도 방아처럼 곡식을 찧는 것이 아니므로 사실상 강태공의 조작방아처럼 빈 방아를 찧을 따름이다.
놓고 때리고 들고나 때리자
여게도 때리고 저게도 때리고
꼼탁꼼탁 때리나 보자
일하는 데는 소리가 날개요
밤에 하는 데는 붕알이 날개다
옛님이 오실란가
주춧돌에 땀이 나고
정든 님이 오실란가
요내 몸이 굽이로 친다
거제에서 윤부금 아주머니가 부른 소리이다. 땅 다지는 행위가 방아찧는 모습으로 노래되다가 어느 덧 밤방아 찧는 쪽으로 성큼 비약을 한다. '일 하는 데에는 소리가 날개'라는 말은 일노래로서 민요의 기능을 적절하게 드러낸 것이다. 소리를 하며 일을 하면 마치 날개를 단 듯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도 일 나름이다. 밤일은 다르다. '밤에 하는 데'에는 소리가 날개 아니라 붕알이 날개란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터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옛님이 오시려는가 주춧돌에 땀이 난다고 한다. 옛님은 무엇이고 주춧돌은 뭣이길래, 옛님이 오시려 하는데 주춧돌에 땀부터 날까. 주추가 받치고 있는 것은 우뚝한 기둥이다. 기둥이 남근을 상징한다면 이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은 여근을 상징한다. 기둥서방이 오려고 하니 이를 받을 주추 곧 여근이 물기를 머금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다음 대목은 한층 더 노골적이다. 정든 님이 오시려는지, 이내 몸이 굽이친다고 한다. 나를 품고자 하는 님과 요동치는 내 몸의 역동성이 육감적으로 거침없이 노래된다. 땅 다지기와 같은 고된 일을 하면서도 성을 연상하며 몸과 마음을 설레는 옛 어른들의 풍류가 부럽다.
에- 지경이 받아놓구 보니
기분두 좋고 잘못 됐네
광목 두 통을 안 놓구 보니
고사한 거 헛 했구나
선소리 하는 사람 욕하지 말고
너의 양심에 맷긴다나
명산대천에 불공을 말고
나 댕긴 친구를 괄세 마라
안성 사는 유병세 할아버지 소리이다. 집터를 다지기 전에 고사상을 차려놓고 간단한 제의를 올린 뒤에 음복을 하고 고사주를 나누어 마신다. 그리고 나서 집터를 다지는데, 앞소리꾼의 감정이 뒤틀린다. 음복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긴 하되, 지경꾼들에 대한 집 주인의 배려가 부족한 탓에 섭섭하다. 술만 아니라 광목도 두 통 정도는 내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고사 지낸 것이 사실은 헛 지낸 셈이라는 것이다. 쥔 처지에서는 상당히 치명적인 지적이다.
상여를 매거나 상량식을 할 때처럼, 집터고사를 올릴 때에도 넉넉한 집에서는 광목을 쓴다. 그러면 상두꾼이나 목수 등 일하는 사람들이 광목을 나누어 갖는다. 광목이 귀했던 시절에 일꾼들에게는 광목 짜투리가 어느 정도 품삯 구실을 했다. 그런데 집터고사를 지내면서 광목 한 통 안 내 놓았으니 주인의 인색함을 나무라며 양심까지 들먹인다. 그리고 쓸데없이 명산대천에 불공을 드리지 말고 나돌아다니는 이웃 친구들이나 괄시를 말아라 이른다. 집터 다지는 소리를 하면서 양심 따지는 소리까지 겸하고 있다.
최근에 김종필은 대통령제가 사실상 대통령 무책임제라는 비난과 함께 대선에 나서면 내각제를 한 뒤에 물러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며 출마의 뜻을 밝혔다. 말만 들으면 그럴 듯하나, 국민들은 지금 말은커녕 문서로 된 공약조차 믿지 않는다. 그 동안 너무 속아왔기 때문이다. 내각제 공약을 만천하에 내걸고 집권하여 국무총리까지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무책임제라고 나무라는지 알 수 없다. 기껏 자질이 모자라는 측근 인사들을 장관 자리에 밀어 넣은 것이 고작이 아닌가. 공동여당으로서 무책임하게 권력의 기득권만 누리느라 내각제 개헌을 제대로 추진하려 들지도 않은 사람이 이제 다시 내각제를 하겠다면 누가 곧이들을까. 정치판의 터다지기는 곧 민심 다지기이다.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는 오랜 민심 다지기 노력 없이 대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내놓는 공약은 모두 표 훔치기이자 한갓 민심 현혹하기일 따름이다. 김종필의 내각제에 현혹될 민심이 아직 있기는 한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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