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어느 소녀의 삶

입력 2001-11-05 15:59:00

가을 문턱에 접어든 지난 10월, 내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 남산동 판자촌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선천성 장애인으로 관절염이 악화돼 거동조차 힘들어 누워만 있는 아버지, 성장장애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 신체조건을 가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학 1년생 한 소녀 가장을 만났다.

3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자 병원 알코올 냄새와 퀘퀘한 방안 냄새가 코로 밀고 들어왔다. 소녀의 아버지는 자리에 누워서 우리를 맞으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지금 살고있는 조그마한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해서 생활보호대상에서 제외돼 끼니조차 잇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소녀 가장의 한달 생활비가 일반 가정의 회식비 정도임을 알고 마음이 착잡했다. 아침밥을 짓고 학교를 마친후 집으로 돌아오면 빨래와 청소, 부모님 봉양이 소녀를 기다리는 현실에서 그 아이는 무슨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는지….

더욱 놀란 것은 부모가 모두 양부모였다. 양부모를 모시고 수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한번 들러 작은 금일봉을 전달하려했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녀의 미래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어둡기만 했다. 부디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해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회인으로 독립하기만을 마음 속으로 빌었다.

연말이 가깝다. 매년 이맘때면 너나없이 불우이웃돕기에 나선다. 그러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애정없이 그저 얼굴만 내밀면 끝난다는 식의 시민 의식구조는 문제다. 또 진정으로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겉도는 복지정책도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작은 사랑과 정성이다. 우리의 가슴이 언제나 작은 사랑으로 충만한지 한번 살펴보자. 어려운 환경에 처한 실직자들, 장애자, 불우한 이웃들을 감싸안을 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복지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패션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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