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휴대폰이 쓰이는 모양을 보면, 과연 휴대폰이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휴대폰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휴대폰은 우리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고있다.
디지털 통신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지하철에서까지 휴대폰을 이용하여 통화를 할 수 있다. 그러니 조용히 눈을 감고 졸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휴대폰 통화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을 주게 된다. 그런데 지하철 안에서 진행되는 통화내용을 듣고 있으면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지하철에서 들리는 휴대폰의 통화내용은 무슨 급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무선으로 연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엊그제 지하철에서 들은 통화 내용을 소개하면, " 나 지금 양재역을 막 지났는데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바꿔 탈 예정이야, 그런데 지금 어디 있어?" 하는 것이다. 아마 이 질문에 대한 상대편의 대화는 "나 지금 충무로 카페인데 기다리는 사람이 안 오네" 등일 것이다.
이것보다 더한 경우는 누구든지 사무실로 전화해서 없는 경우 즉각 휴대폰 번호가 몇 번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무실에 있든 없든 휴대폰을 통하여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격이니 결국 24시간 가동체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24시간 가동이 가능한 것은 컴퓨터나 기계뿐이고, 따라서 통신기술의 발달이 점점 사람을 기계화시키는 모습이 된다. 게다가 허리에 휴대폰 등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한편 전화 수리공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기계와 기술에 종속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러한 휴대폰보다 더 종속되기 쉬운 것이 e메일이다. 일단 e메일을 쓰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e메일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e메일을 하루에 한 번 체크하기보다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체크를 하다가, 나중에는 매시간 하게되고 드디어는 매 5분마다 e메일을 체크하게 된다. 이와 같이 e메일을 체크하는 사람들의 변명은 누가 무슨 소식을 보냈느냐 궁금해서가 아니고, e메일을 통하여 쉴 사이 없이 변동되는 주위환경을 알게 되고, 이런 변동에 적응하여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의 명언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연결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가 되는 격이다.
이와 같이 사람과 기계가 더불어 살다보니 자연히 우리들의 생활태도도 바뀌게 된다. 즉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데 또 휴대폰이 걸려오니 두 개의 전화를 동시에 받아야 하는 슈퍼맨이 되고 만다. 또 컴퓨터에서 e메일을 체크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리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보니 우리의 주의력의 반은 컴퓨터에, 반은 휴대폰 통화에 쓰다보니 모든 것에 전심전력하기보다는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우리의 주의력을 보내며 생활하는 모습이 된다. 결국 모든 일에 부분적 주의만 할 뿐 어느 일에 집중하는 태도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기계와 기술에 의해 얽매어 있으므로 인하여 생기는 생활의 고통과 비효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기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계는 인간의 기능을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기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계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이 기계에 얽매여 사는 경우 인간의 기계화 내지는 심한 경우 인간이 기계의 노예화가 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인지 기계의 노예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활 태도를 바꾸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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