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섬유회사를 다니다 실직한 김모(37)씨는 1일 우울한 마음으로 부모님이 계시는 영양을 찾았다. 안부차 들린 게 아니라 아들(8)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 보기 위해서다. 지난 연말 실직하면서 형편이 쪼들리자 급한 대로 고향의 부모님께 맡겼지만 실직기간이 길어져 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니게 할 줄은 생각 못했다. 하지만 김씨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적지 않고 학교측에서도 이런 사정을 알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써 준다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경기 침체에 실업난이 겹치면서 해마다 감소하던 농촌 지역 초등학교 입학생수가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촌 출신 도시 생활자들이 궁여지책으로 자녀들을 고향의 부모나 친지에게 맡기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
영양군의 경우 올해 초등학교 입학자 수가 190명으로 지난해보다 17명 늘었다.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20~30명씩 줄어들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현상. 도시에서 고향의 조부모나 친지 집으로 홀로 전입해 입학통지서를 받은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영양군 입암면사무소 관계자는 "출향인들의 실직과 파산 등으로 자녀들이 홀로 고향으로 보내져 취학 또는 전학하는 경우가 면별로 평균 10여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안동의 읍·면 지역 초등학교 역시 입학생 수가 5년만에 20명 가까이 늘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도시로 떠나는 학생보다 되돌아오는 학생이 더 많아진 까닭이다. 공공기관이나 생산시설 신설 등 학생 유입 요인이 전혀 없는데도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돌아오면서 농촌에는 다소 활기가 생겼다. 곳곳에서 아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산과 들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것은 떠나가는 농촌에 새로운 생동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냥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학습 준비물 마련이나 통학 등에 신경쓰기에는 노인들의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영양읍 서부리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박모(65) 할머니도 실직 후 안동에서 노점상을 하는 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손녀를 데려와 입학시켰지만 걱정이 크다고 털어놨다. 학용품이나 준비물을 마련하기 위해 1주일에 한두번 시장에 다녀오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아침마다 손녀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여 통학버스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내내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통학버스를 기다렸다가 데려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과다.
농사일까지 하는 노인들은 부지런히 집과 큰길, 논밭을 오갈 수밖에 없게 됐다. 젊은 사람 몫의 농사일도 버겁지만 손자 손녀에게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내내 신경을 놓지 못한다는 것.
학교 교사들은 당초 신입생 숫자가 늘자 당황하는 모습도 적잖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돌아온 속내를 알고는 한층 마음을 쓰려는 분위기다. 영양의 김모(34·여) 교사는 "신입생들의 가정형편을 조사해보니 의외로 도시에서 혼자 전입해온 아이들이 많아 놀랐다"면서 "각별히 배려하기로 교사들끼리 의논을 마쳤다"고 말했다.아무래도 대량실업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따라서 실직자녀의 재기를 돕기 위해 손자와 손녀의 교육을 맡는 농촌 노인들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나홀로 시골에' 오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건 씁쓸한 일이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는 것도 정서적으로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그나마 위안거리다.
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영양·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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