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수립 50년(상)

입력 1998-08-20 14:59:00

남북한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 체제대립과 경쟁을 해온지 50년.우리정부가 8월15일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제2의 건국'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북한도 오는 9월9일 북한정권 창건 50주년에 앞서 김정일(金正日)노동당총비서의 주석취임 분위기 조성에 분주하다.

김일성(金日成)에 이은 '김정일주석체제'의 등장은 교착돼있는 남북관계 개선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정권 50년'은 한마디로 김일성(金日成)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수령사'적 과정이라는 지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방직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때까지가 김일성의 권력획득과정이라면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주체사상이 당의 유일지도사상으로 채택될 때까지는 김일성유일지도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고 그 이후는 김정일의 후계체제 확립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이 사망한 94년이후 '유훈통치'시대를 이끌던 김정일은 지난 7월21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통해 4년만에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대내외에선포하게 된 것이다.

8.15해방직후 소련군소좌의 신분으로 귀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외에는 국내에 기반이 전혀 없었다.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집회'에서 소련군의 레베데프소장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는조만식(曺晩植)선생 등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북한지역의 제정치세력을 통합하고 토지개혁등을 통해 권력 기반을 마련, 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고 초대수상에취임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김일성이 공화국을 수립하기까지의 권력장악 과정은 대략 다섯단계로 나눌 수 있다. 우선김일성은 45년 10월10일 평양에서 소련군에 의해 비밀리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대회 첫날 기조연설을 함으로써 권력획득의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김일성은 이날을'북한노동당 창건일'로 삼았을 정도로 의미를 부여했다. 김일성은 곧바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설치했고 12월 17일 개최된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돼 당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조만식이 북한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모스크바 3상회의'(45년 12월27일)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문제는 좌.우연립을 무너뜨리면서반탁(反託)입장에 선 조만식을 몰락시켰다. 김일성은 이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에오르면서 행정기관까지 장악했고 46년 3월에는 남한과는 달리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한 토지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 지지기반을 넓혔다.

김일성은 같은 해 8월 북조선노동당을 창건, 48년 6월 조선노동당으로 좌익세력을 완전 결집시켰다. 이어 11월 도.시.군인민위원회선거를 실시해 47년 2월 '임시'자를 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고 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당시 남한은 5.10(48년)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 남한단독정부 수립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북한도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일으킨 '6.25전쟁'을 김일성은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계기로활용했다.

김일성 1인독재체제는 60년대 초반에 확립됐지만 그때까지의 권력투쟁의 과정은 치열했다.김일성은 6.25전쟁을 정적들에 대한 숙청의 계기로 삼았다. 그는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53년초 국내파 공산주의자의 최고지도자였던 박헌영(朴憲永)과 이승엽 임화 등 남로당계의 거물들을 '정권전복음모사건'에 연루시켜 숙청했다. 허가이(소련파)와 무정(연안파)등도 종파분자들로 몰아 숙청했다. 전쟁중에 발생한 스탈린의 사망(53년)과 이에 따른 스탈린격하운동등 사회주의권의 변화도 '주체노선'정립의 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56년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노선은 연안파와 소련파 등 반(反)김일성세력들이 반김일성투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했다. 56년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석한 브레즈네프는 '조선노동당이 개인숭배의 오류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은 권력장악후 가장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김일성이 56년 6~7월 경제원조를 위해 소련과 동구권을 순방하고 있을 때 김두봉, 최창익 등 반김일성파들이 김일성 추방쿠데타를 모의한 것이다. 이를 비밀리에 안 김일성은 급거 귀국, 노동당의 8월 전원회의를 통해 이들을 '종파주의'로 몰아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이후 김일성은 대소(對蘇)자주성과 유일체제 강화를 통해 '주체노선'을 대내외에 천명하게됐고 57년 10년만에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통해 2백15명의 대의원을 선출,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일단락짓는 한편 유일지도체제의 기반을 확립했다.

67년, 김일성은 자신의 혁명동지이자 정권창출의 핵심세력이었던 박금철,이효순 등 '갑산파'를 숙청했고 69년 유일적 지도체제 형성의 걸림돌이 되는 허봉학, 김창봉, 최광 등 자신의직계그룹들을 다시 숙청했다. 친인척중심의 지배구조가 핵심권력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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