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가야산을 품에 안고 지리산을 향해 내리뻗은 소백산맥. 줄곧 이어져온 산맥의 허리가 지리산을 코앞에 두고 동서를 가르는 큰 신작로때문에 잠시 끊어진다. 88고속도로. 이 고속도로에 차를 얹어 내닫다보면 영·호남이 만나는 지점에 경남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매치(梅峙)고개에 이른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전북 남원시 아영면 의지리 밤골(율동).20여년전만 하더라도 매치고개는 함양과 남원사람들이 쉽게 넘나들 수 없는 '소도'였다. 매치마을 아이들이 아영면 '가설극장'이나 밤골 '노래콩쿠르'을 보려면 대여섯명이 떼를 지어몰래 고개를 넘어야 했고, 아영면 사람들도 백전시장에 가기 위해서는 매치고개를 피해 논둑으로 다녀야만 했다. 밤골과 매치마을 아이들 사이에는 돌팔매와 패싸움이 끊이질 않았고,때론 '어른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단지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차별때문이었다.그러나 이같은 사연도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됐다. 14년전인 지난 84년(6월27일) 고속도로가뚫리면서 양 지역 농산물이 대구·진주, 남원·광주로 사통팔달 유통되고, 사람들의 교류가잦아져 이젠 더할 나위없는 이웃사촌이다. 모내기가 빠른 아영면의 농사일을 백전면 사람들이 거들고, 다시 백전면 모내기때는 아영면 사람들이 도와준다. 품앗이로 교류도 하고, 일부담도 더는 셈이다. 최근엔 백전면 양파와 아영면 감자 출하가 한창이어서 양 주민들의 왕래가 잦다.
열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매치마을. 주민들은 88고속도로로 교통이 편리해진 반면고속도로로 인한 고충도 크다며 하소연한다. 고속도로 건설로 마을앞에 펼쳐진 미나리꽝이사라졌고, 수맥이 끊겨 물사정이 좋지 않자 많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 게다가 주민 대부분이 아영면에 논을 갖고 있는 바람에 영농자금 지원받기가 힘들다. 함양군은 논이 남원땅이라는 이유로, 남원군은 논 소유주가 함양군민이라는 이유로 자금지원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낮에는 전라도에서 논농사를 짓고 밤에는 경상도에서 잠을 자는 생활에 익숙해졌다.매치마을에서 5천여평의 밭을 가꾸고 있는 아영면 주민들은 이와 정반대다. 매치마을엔 경상도·전라도 부부만도 세쌍이다. 이 동네 서부원씨(40)는 "서로 어울려 살다보니 말씨마저경상도와 전라도사투리가 뒤섞여 타지 사람들에겐 새로운 방언이라고 불릴 정도"라고 설명했다. 서씨의 어른 서종두씨(74)등 이 동네 서너명의 노인들은 아영면 경로당에 다닌다. 이들은 최근 아영면 노인들과 어울려 남원에서 열린 노인게이트볼 대회에도 참가하는등 이제는 서로 친숙해진 편이다. 박옥경할머니(67)는 "아영면에서 사료나 가스를 구입할때 매치사람이라고 하면, 멀리서 왔다며 양도 더많이 준다"고 거든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백전면과아영면은 양 지역의 교류를 더욱 돈독히 하기위해 '친선체육대회' '면단위 자매결연' 등을추진하고 있다.
백전면은 지리산 일대와 더불어 토종꿀 생산지가 넓게 분포해 있다. 야생꽃이 모여피고, 밤나무가 울창한 주변여건 때문이다. 오천리 양천마을 10여가구는 2백50여통의 한봉(토종벌)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한봉 30통을 가지고 있는 노인상씨(60). 88고속도로 개통 당시만 하더라도 백전면에는 양봉(洋蜂)이 주를 이뤘으나 주민들이 한봉 산지로 바꿨다. 10여년전 한봉협회 회원들이 오천리 일대 50통의 양봉을 매입, 타지로 멀리 옮긴 것이다. 백전면에는 더이상 양봉이 들어오지 못한다. 노씨는 20여년간 토종꿀만 떠내 6남매를 키워왔다. 올해들어 설탕값 폭등으로 벌통 30개를 줄였지만, 그는 하루종일 벌통에만 매달린다. 벌 몸집에 진드기제거 약품을 뿌리고, 벌통 청소를 하고, 벌통을 새로 이어주는 등 쉴 틈이 없다. 조금이라도관리를 게을리하면 벌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특히 요즘은 밤꽃이 활짝 펴 꿀이 많이 쌓이는데다 5~7년의 수명을 다한 여왕벌이 새 여왕이 될 알을낳는 시기여서 더욱 그렇다.
이젠 벌도 밥(설탕)주는 주인을 알아본다. 보호망을 쓰지 않은 서씨를 웬간해서 쏘지 않는다. 그는 설사 벌에 쏘이더라도 모기에 물린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벌통을 추가로쌓다 밖으로 나온 벌들이 벌통 틈새에 끼여 죽을때면 서씨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 또하나 서씨가 아쉬운 것은 판로문제. 지금은 객지에 있는 일가·친척들을 통해 벌꿀을 내다 팔지만, 88고속도로를 타고 대도시로 나가 대량으로 꿀을 팔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게 그의유일한 희망이다.
소백산맥을 가로질러 영·호남을 이어주는 88고속도로는 새로운 땅,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꿈이 녹아있다. 거대한 산맥과 사람들, 그리고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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