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정수리 금오산(金鰲山)에 올라서면 만불정토의 장관이 펼쳐진다. 누천년동안 많은 절이 서고, 탑이 서고, 불상들이 새겨졌고 아직도 숱한 설화가 남아있는 땅, 남산….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만불산(萬佛山)의 이야기는 남산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새삼 돌이키게 해준다. 신라 35대 경덕왕때 오색주단과 침단목에 명주, 미옥등 보배구슬로 화려하게 꾸민가산(假山)인 만불산. 높이 한발 남짓하면서도 살아움직이는듯 자연과 사람, 불(佛)과 법(法)과 승(僧)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갖가지 형상으로 차고 넘쳤던 산이다. 만불산이 신라사람들의 불심을 엮어 만든 소망의 상징이라면 이같은 신라인의 꿈을 현실로 지상에 이뤄놓은 실재의 만불산이바로 남산이다.
이렇듯 남산에는 만불을 지향한 신라정신의 뼈대이자 원형적 상징인 숱한 불교설화가 남아 오늘에 전한다. 지금은 넘어지고 깨어져 흔적없이 사라진 수많은 절과 탑, 불상의 그림자에도 이야기는 얽혀있고 바위와 수목,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고승대덕의 가르침이 남아있다.신라의 남산은 아미타불신앙의 극락(極樂)정토와 미륵불신앙의 용화(龍華)정토사상이 결집된 총화다. 신라불교의 맥을 이룬 원류인 이 두 사상에서 공통점을 찾아낸 신라사람들은 특유의 정토사상을 구축해낸다. 이렇게 이 땅에 퍼진 정토사상은 신라를 정토의 불국토로 만들었다. 불교는 국교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고승대덕들은 대를 이었으며 사탑(寺塔)은 사통오달로 줄을 섰다. 모든백성들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신심을 가져 고행의 길로 나아갔으며 이 고행은 많은 설화를 낳았다.
선덕여왕때 도중사(道中寺)라는 절에 생의(生義)스님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밤 한 늙은 스님이 찾아와 생의스님을 데리고 남산에 올랐다.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풀을 서로 묶어 표를 해놓고 지금 내가 여기 묻혀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편안히 있게 해주시오 라고 일렀다. 생의스님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지만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이 심상찮아 스님이 그 골짜기로 가보았더니 정말로 풀을 묶어 표한 곳이 있었다. 그 곳을 파보았더니 돌로 만든 미륵상이 나와 스님은이를 삼화령(三花嶺)에 옮겨 돌부처를 위하여 절을 짓고 미륵부처를 정성껏 공양했다고 전해진다.미륵불에 얽힌 이 설화는 남산과 서라벌땅을 불국정토로 이루고 살겠다는 신라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설화다.
삼화령으로 추정되는 용장골 제13절터의 뒤편 봉우리에는 현재 복련화를 새긴 지름 2m가량의 대연화대좌가 불상을 잃어버린채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생의스님의 설화에 보이는 바로 그 미륵불로 추정된다. 엄청난 크기의 이 대좌위에 앉았던 불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직도 수수께끼는풀리지 않은채 이견만 분분하다. 연화좌 아래에 세웠던 비석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이 비석마저도 비석대만 남은채 비신(碑身)을 찾을 길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후세 학자들은 설화를 흥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부처의 참모습을 마음속에 형성시켜 마침내 귀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민중교화의 방편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당시 신라인들의 신념은 후세의 학설로도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만큼 순수한 것이었고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경지였다. 신라를 낙원으로 이루려는 신라인들의 노력은 원효에 의해 완성된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서 잘 알 수있다. 신분차별이 현저했던 신라사회에서 천민계급도 신앙의 돈독함에 따라 극락할 수 있다는 이런 사상은 한줄기 밝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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