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남천과 반월성

입력 1997-05-31 14:00:00

"반달같은 궁궐… '영욕의 흔적'만…"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포항방면 산업도로를 따라가길 십여분. 다정한 남산이 옆에 삐죽 고개를 내밀고 상서장 옆 작은 도로를 따라가면 남천이 길게 이어져있다. 양지마을과 해맞이 마을사이를 두고 남천은 흐른다.

짙푸른 녹음에도 남천은 메마르다. 생기가 넘치던 서라벌의 기운이 사라져 버렸듯 풍부했던 물줄기도 갈증에 허덕인다.

때마침 모심기가 한창이라 인근 농부들이 남천물을 빼어다 논둑에 끌어대느라 여념이 없다.천년전 남천은 신라궁궐터 반월성의 자연적 방어진지였다.

반월성 남쪽 성벽아래 도도히 흘렀을 남천의 위용은 빛이 바래고 말았지만 아직도 추억의 편린들이 성터에는 수북이 쌓여있다.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해서 이름 붙여진 반월성. 월성이라고도 하고 임금이 계신 곳이라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다.

반월성을 오르는 길은 차량진입을 금하고있다. 경주박물관인근 파출소에서 반월성으로 통하는 작은 길을 따라 반월성에 오르면 시야가 확트인다. 궁궐터에 길게 깔린 잔디. 싱그러운 솔내음이 아늑한 여유를 안겨준다. 솔밭과 대밭이 어우러져 장광한 풍경을 연출하는 반월성.이터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풍수지리에 얽힌 설화가 간직돼 있다. 신라 4대 임금인 석탈해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아채고 꾀를 부려 원래주인이던 호공(瓠公)으로부터 땅을 빼앗은 곳이다. 탈해는땅을 뺏기위해 호공의 집주변에 숯과 쇠부스러기를 몰래 묻어 놓고는 선대(先代)의 집이니 비워달라고 우겼다.

호공과 탈해의 다툼은 끝내 관가로까지 옮겨져 선대가 대장간을 하던 집안이라 우기던 석탈해의거짓주장에 따라 집주변에 숯과 쇠부스러기가 나오는 바람에 주인이 뒤바뀌게 되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사기의 일종이지만 당시 남해왕은 탈해의 영특함에 놀라 사위로 삼았다. 후에 탈해는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반월성에는 성벽밑으로 물이 흘러내리도록 인공적인 물줄기 해자(垓子)를 만들었음이 지난 80년현지조사결과 밝혀졌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역할을 해냈고 동쪽으로는 인위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해 성벽방어역할을 맡겼다. 남쪽 성터는 남산과 머리를 맞대고있다. 남산 신성 좌창지·중창지가 멀리 보였던 터. 외적의 침략이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남산신성에서 신호를 보내 대비를 하도록했다.

성터 외곽 곳곳에 남아있던 석축들의 잔해. 창을 들고 성벽을 지켰을 신라군사의 늠름한 모습이꿈에서나 나타날까. 길게 이어진 돌의 잔해는 잔잔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성곽 한켠에 있는 석빙고.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석빙고는 애꿎게도 자물쇠를 걸어잠가 외부인의출입을 막고 있다. 또 석빙고 맞은 편 구석에 시멘트 구조물로 만든 흉물스런 화장실. 궁궐터의맛깔스러움이 한치 앞을 못보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들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다시 길을 돌려 둘러본 반월성 외곽. 성터 남편에서 내려다본 남천은 아직도 아름답다. 남천은 몸뚱이를 길게 두리우고 남산을 따라 천년의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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