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정리해고제의 사회

입력 1996-12-13 14:37:00

"이인화 〈소설가·이화여대교수〉"

보통 사람에게 직장에서 목이 잘리는 것만큼 큰 사건은 드물다. 이 세상에 사회정의를 실현하기위해 밤마다 이불속에서 전전반측 잠을 못이루는 사람은 1백만명에 한 명도 없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지 않고, 가능하면 약간의 돈이 있고, 일년에 한두번은 처자식을데리고 좋은 음식점에서 외식을 할 수 있으면 좋아한다. 그렇게 자식들이 커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파란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훨씬많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실업이란 쿠데타가 일어나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불황고통 노동자에 전가

요즘 불황이 장기화되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명예퇴직이란 말이 유행하더니 이제는정리해고라는 말이 심각하게 다가온다. 40, 50대 '고개 숙인 아버지들'의 고뇌를 일간지 사회면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황, 불황하면서 모든 고통을 노동자에 전가하여 사람을 자르고 코스트만낮추면 된다는 정부와 대기업의 안이한 발상은 많은 실망을 안겨준다.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저성장시대를 견디며 살아갈 각오가 가장 미비한 집단이 정부와 대기업이 아닌가 싶다.앞으로 더 혹독한 정리해고를 예견케 하는 개정 노동법은 미국의 리스트럭처를 한국 경제에 도입해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미국경제가 이런 재조정으로 되살아났다, 일본도 하고 있다. 한국도따라가보자는 발상이다. 이런 발상의 밑뿌리에 있는 것은 미국이 개발한 것을 흉내내고, 일본이파는 것을 하청받아 경제를 일구어온 과거의 역사이다.

스스로의 지혜를 짜내지 않고 언제나 미국, 일본만 바라보며 살아온 한국의 관성이 정리해고제의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대기업 안이한 발상

과연 임금을 동결하고 인원만 정리하면 이 불황이 나아질 것인가. 현재와 같이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정부기구를 그대로 두고 어떻게 미국과 같은 구조 조정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동안 정부는규제완화를 구실로 일은 안하고, 세계화를 구실로 기구는 잔뜩 신설하는 중구난방의 정책으로 4년을 일관해왔다. 2002년까지 방위력 증강때문에 1백조원 규모의 무기 수입을 추진하겠다는 발표에는 어안이 벙벙하다. 결과적으로 규제 완화도 못하고 불황 대책도 없는데다 무역 적자만 산더미처럼 불려놓은 것이 오늘의 문민정부이다.

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의류, 신발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가전제품에 자동차까지 한국의 단골기술을 모조리 중국과 베트남이 가져가버리도록 우리의 경영층들은 무엇을 했던가. 첨단개발을해야 살 수 있다고 말만 하면서 정작 첨단개발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지는 못했다. 왜 우리기업의 직원들은 언제나 인간관계로 살아가며 일 그 자체의 추구가 부족한가. 왜 상사의 성격이나 취향을 파악하는데는 아주 열심이면서 일은 전부 '이 정도면 된다'고 끝내버리는가. 첨단적인성과를 내도 몇 억원씩의 보너스라는 시스템이 없다. 그나마의 업적 평가도 중간관리직이 가로채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바보같은 직원이 미국처럼 머리를 싸매고 회사에서 몇달씩 묵새기며 일에 골몰할 것인가.

*즉흥적 해결책 혼란 불씨

한국경제가 부딪힌 불황은 그 원인이 단순히 임금이나 고용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경쟁력이 없다면 그 원인은 정부와 기업과 노동자를 아우른 한국경제의 총체, 그 전체가 문제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이 담합하여 불황의 원인을 노동자에만 전가하려 한다면 그것은심각한 사회 불안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힘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즉흥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해결책이 혼란의 불씨가 되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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