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 실종위장한뒤 폐후강요

입력 1995-10-09 08:00:00

일제는 1895년 조선조정의 친러정책에 불만을 품고 친일내각을 수립하기위해 이노우에(정상 형)공사의 후임으로 군출신 과격파 미우라(삼포오루)를조선공사로 파견했다. 미우라는 친일내각을 수립하기위한 첫단계로 대원군의쿠데타로 가장해 민비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그는 대원군에게 접근, 암살계획은 은폐하고 집권을 돕겠다고 회유했다.애초에 민비암살 실행일을 11월로 결정하고 민비의 사진을 찍어 일군수비대에 전달했다. 이같은 기록들은 일본인 사학자 츠노다 후사코(각전방자)의 '민비암살사건'(신조사)이란 책에 나타나 있다.

미우라공사는 이 계획이 외부에 누설될 것을 염려, 서둘러 시행하기로하고그시기를 10월8일 오전4시로 결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순사, 일본대사관원, 대륙랑인등으로 구성된 50여명의 폭도들이 집합했고 이들은 용산을 출발, 제2훈련대 2백여명과 일본인 수비대 1백40여명이 합류해 궁궐에 난입했다. 이때 시위대(궁성경호조직)의 홍계훈이 이들과 대항하다 피살되는등 당시 미우라는 궁궐 주변에 1천여명의 병력을 동원, 전쟁을 방불케하는 음모를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0월8일 오전8시경 미우라는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부어 화장시켜 흔적을지우게 한뒤 건청궁에서 대원군과 함께 고종을 만나 '민비 자신이 신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국왕을 버리고 피했기때문에 왕후로서 자격이 없으므로그 신분을 평민으로 한다'라는 폐후소칙에 고종의 서명을 강요했다.이는 민비 스스로 영원히 자취를 감춰버린것처럼 위장하려 했던 것이다.고종은 "내게 그 서명을 요구하려거든 내팔을 잘라 가거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미우라는 이 폐후내용을 각국 공사관에 통고했다. 그후 각국 공사관은 이사건이 임의로 조작된 일본의 침략적행위라고 비난했고 미우라는 이를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건당시 조선 시위대의 미국인교관 '제너럴 다이'와 러시아인 '사바치느'가 현장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후 미국정부문서 보관소에서 원본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확실시 되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이 사건을 비난하고 나서자 당시 이토오(이등박문) 내각은 이 사건이 일본정부와 무관한 미우라 개인의 사건이라고변명하고 사건수습단을 조선에 파견한 후 미우라를 비롯 관련자 40여명을 귀국시켰다. 그후일련의 사건처리에 대해서는 논문집 '일본정치재판사록'에수록돼 있는 다나카 도시히코(전중시언)의 '민비살해사건'이라는 논문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사건처리조사단장이었던 고무라(소촌수태랑)가 조선공사로 부임했고 그후 내정간섭은 극에 달했다. 이듬해(1896년) 1월4일 친일 내각은 이 사건과 직접관련 없는 한국인 혐의자 33명을 재판에 회부했다.예를들어 훈련대의 부위였던 윤석우는 우연히 시체소각장소 옆을 지나다유골을 땅에 묻었다는 행위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일본인은 종범이라하여 형을 가볍게 할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일단 미우라를 비롯한 40여명의 관련자(일설에는 돈으로 고용된 죄수)를 히로시마(광도) 감옥서에 수용했다. 그러나 용의자들이 정부책임이라며 혐의를 부인하자 히로시마 지방재판소는 '범죄를 인정할 자료가 불충분하다'며 전원을 석방했다.

이같은 민비시해사건에 관한 한일관계사 자료들을 수집분석하고 있는 역사연구가 최장근씨(도쿄 팔왕자시)는 "1백년이 지난 지금도 왜곡된 역사 기록이 많아 한일간에 서로 진실을 밝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교훈으로 평화공존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명성황후 1백주기를 맞아 불행했던 역사를 민족적 자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박순국특파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