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민족...마한·진한·변한의 삼한(三韓)에서 따온 명칭
중국, 고조선·고구려·발해 이전 동이문화, 한족(漢族)문화로 편입
동이족 역사를 계속 외면한다면 우리의 뿌리를 빼앗길지도 몰라
◆한족(韓族)과 동이족(東夷族)
우리 민족을 한(韓)민족이라고 부른다. 마한·진한·변한의 삼한(三韓)에서 따온 명칭이다. 한(韓)은 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인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한 후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고 부른 것이 시초인데 서기전 3세기 경의 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했다고 말하고, 조선의 고종이 조선국을 대한(大韓)제국으로 개칭한 것은 모두 우리 민족을 한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동이는 동쪽 오랑캐의 뜻인데 왜 우리를 오랑캐라고 부르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항상 내부에 있다. 현재 《네이버사전》에 '이(夷)'자를 치면 '오랑캐 이'라고 나온다. 반면 중국에서 서비스하는 《한전(漢典)》은 "중국 고대 동쪽 민족의 칭호"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우리를 '동이(東夷)'라는 민족의 틀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이 시초로서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삼한·왜'의 일곱 나라를 동이족의 국가로 서술했다. 『후한서』는 후한 광무제(서기 25년)부터 헌제(220) 때까지 195년의 역사이다. 중국 최초의 부수별 한자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중국 후한 때인 서기 100년 경 허신(許愼)이 편찬했는데, 그 시대에는 한자의 표준 서체가 정립되지 않아서 본래 유교 경전과 다른 글자를 쓰기도 하고, 해석이 서로 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허신은 한자의 표준 형태, 본래의 뜻을 규정한 《설문해자》를 편찬했다.
《설문해자》 대부(大部)에서 허신은 이(夷)자에 대해서 "이는 평평하다는 뜻이다. 큰 것과 활을 따른다. 동방 사람들이다(夷, 平也. 從大從弓. 東方之人也.)"라고 설명했다. 보통 동이를 해석할 때 이 구절을 가지고 '큰 활을 따르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평(平)자에 주목한다. 평은 저울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룬 모습에서 유래한다.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다거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뜻이다. 또한 편안하고 온화하다는 뜻과 평정하거나 다스린다는 뜻도 있다. 허신이 동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글자의 첫 뜻으로 '평'을 꼽았다는 것은, 동이를 치우침 없이 고르고 온화한 사람들로 보았다는 뜻이다.
앞서 인용한 《후한서》 〈동이열전〉은 허신의 《설문해자》와는 조금 달리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서문에서 동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제(王制)〉에서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뿌리로서 생명을 가진 것들을 좋아하므로 온갖 생물이 땅을 근본으로 나오는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그래서 [동방 사람들은] 천성이 부드럽고 순하여 도(道)로써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심지어 군자국이나 불사국(不死國) 같은 나라들이 있다."
◆동이(東夷), 생명을 존중하는 군자의 나라
〈왕제〉는 《예기(禮記)》의 한 편인데 '이(夷)'는 뿌리이자 생명을 가진 것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현재 중국 산동성 임기(臨沂)시에 거대한 동이문화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서 펴낸 도록 《도설동이(圖說東夷)》도 동이를 "근면하고 용감하며 지혜롭고 어질고 덕망이 높은" 사람들로 소개한다. 이렇게 보면 《설문해자》와 〈왕제〉에서 말하는 동이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이 아니라 만물의 뿌리처럼 생명을 품고 아끼며, 천성이 부드럽고 순해서 도(道)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치우침 없이 고르고 균형 잡힌 '평'의 성품을 지니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사람들을 뜻한다.
《설문해자》나 《예기》는 중국의 고대 학자들이 쓴 책이다. 그들의 눈에 동이는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살생하지 않고, 평평하고 고른 것을 추구하며 천성이 부드럽고 순하며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당시 동이족이 중국 한족(漢族)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녔다는 생각에서 '군자의 나라'라면서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
◆동이족의 천손의식과 환웅의 신시 건국
《후한서》 〈동이열전〉은 동이에는 아홉 종족, 즉 구이(九夷)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이족은 산동반도, 장강 중·하류, 황하 중·하류, 동북 지역 등에 흩어져 살았지만, 하늘의 자손이라는 공통의 문화 정체성을 지녔다. 동이족의 난생신화는 하늘의 자손이 알의 형태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내려온다. 알은 하늘과 태양을 상징하는데, 동이족이 태양을 숭배하거나 제천의식을 중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하늘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때로는 알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기도 하는데 단군신화 속 환웅이 그러하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통치 이념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다스렸다. 내몽골 홍산문화 후기는 고고학적으로 단군신화의 내용과 부합한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1909~1990)는 국가발전단계를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으로 나누었는데 홍산문화 후기를 '고국(古國) 단계'라고 분류했다. 환웅의 신시를 고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시사이다.
◆홍익인간의 실천과 환웅의 신시 통치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이 신시를 건설하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가지 일을 관장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오늘날의 '먹사니즘'처럼 먹는 문제를 해결했고, 병 안 걸리고 오래 살면서 옳게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뜻이다. 중국 답사를 다니다 보면 돌로 만든 농기구나 곡식을 가공하는 갈판 등이 많이 출토된 것을 볼 수 있다. 환웅은 농사를 주관해 곡식을 넉넉하게 하고, 농사짓는 법과 곡식을 저장하는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켰을 것이다.
다음은 수명과 질병인데, 내몽골 지역에서는 뼈로 만든 침, 곧 골침(骨針)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출토된다. 홍산문화보다 1,500~2,000년 앞선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에서는 치아 수술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내몽골자치구 통료(通遼)시에서는 수술 때 마취제로 썼을 것으로 보이는 대마씨도 발견되었는데, 홍산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3500년경의 것이다. 환웅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의술을 한층 발전시켜 질병과 수명을 다스린 것이다. 먹거리가 풍부해지고 의료 수준이 높아지자 인구가 늘고 수명도 길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웅은 형벌과 선악을 주관했다. 환웅은 선악의 기준을 제시해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형벌을 주관해 사회 질서를 바로잡았다. 《산해경(山海經)》 〈해내경〉에서 조선 사람들은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홍익인간의 정신이 삶 속에서 실천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중원 동이족을 어떻게 해석하나?
홍산문화에서 꽃 핀 기술과 문화는 주변으로 확산되어 갔다. 물론 일방적 전파라기보다는 이동과 교류 등을 통해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했을 것인데, 북방 홍산문화 옥기와 똑같은 옥기들이 머나먼 남쪽 장강 하류 능가탄 유지(凌家灘遺址, BC3800~BC3300)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런 예 중의 하나이다. 고대 사람들이 고립된 채 살았을 것이라는 현대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북방의 홍산 동이족들과 산동성의 대문구(大汶口) 동이족들과 장강 하류의 능가탄 동이족들은 물줄기를 통해서 서로 왕래하면서 기술들을 공유했다. 이들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옥인(玉人), 옥저룡(玉猪龍), 옥귀갑(玉龜甲) 등의 옥기류가 그런 교류를 말해준다.
현재 중국은 중원 각지에서 나타나는 동이족 유적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산동성 임기 동이문화박물관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임기시에 국가급 동이문화원(東夷文化園)을 조성하고, 그 안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약 3분의 1 크기인 박물관을 2억5천만 위안(현재 가치로 약 500억 원)을 들여 2015년에 개관했다. 박물관은 1천여 점의 유물을 역사관, 고고관(考古館), 풍속관(風俗館) 등 8개 전시관에서 전시하는데 동이족의 인물과 생활 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체계화했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큰돈을 들여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대규모 공원과 박물관을 세운 목적은 무엇일까? 마지막 전시관인 이하(夷夏)문화융합관에서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전시관은 용산문화(龍山文化, 서기전 3000~1900년경) 시기에 정복과 전쟁을 거치며 화하민족과 동이족이 초보적인 융합 단계에 들어섰다가 나중에 화하민족, 즉 한족(漢族)으로 편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설동이》는 이렇게 정리한다."동이족은 후대 화하민족(華夏民族)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속과 습관, 예제(禮制), 예기(禮器) 등 여러 방면에서도 하(夏)·상(商)·주(周) 삼대(三代)의 문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동이문화(東夷文化)는 중화문명(中華文明)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고구려·발해(대진)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킨 중국이 그보다 앞선 동이족까지 중국사의 틀로 편입시키기 위해서 동이문화박물관을 세운 것이다.
◆동이문화의 역사적 정체성과 우리의 과제
중국은 동이문화를 자랑스러운 한족(漢族)의 앞선 문화로 정리하면서 관련 연구도 매우 활발하다. 중국의 연구자들은 동이문화가 화하족과 융합되어 오늘날 중국 문화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늘 우리나라 학자들이다. 사대주의에 찌든 한국 학계는 동이를 언급하면 수구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며 선사시대 중원에서 활동했던 동이를 우리와 무관하다고 배제한다. 그러니 공부 자체를 안 한다. 우리가 동이에 대해 침묵하는 동안 중국은 고조선·고구려·발해 이전의 동이문화를 중화문명의 앞선 문화라면서 한족(漢族)문화로 편입시켰다. 동이족의 역사를 계속 외면한다면 우리의 뿌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고대사는 늘 현대사인 것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