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가 고향을 영원한 기억으로 만들다'
한국 현대시의 거장 정지용은 '향수'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라는 시구는 한 고장의 풍경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 놓았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정지용은 어린 시절 바라본 들판과 실개천, 산과 바람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의 대표작 「향수」는 단순한 고향 노래가 아니다. 고향은 떠나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좋은 시는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향수」에는 떠나온 사람이 마음 깊이 간직한 시간과 추억,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담겨 있다. 옥천은 정지용의 삶과 작품 세계를 따라가며 시인의 문학적 발자취를 만날 수 있는 '향수의 고장'이다.
◆정지용 시인의 첫 숨결이 머문 곳, 옥천
옥천은 충북 남부에 자리한 고장으로, 금강과 대청호를 비롯해 산과 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정지용은 1902년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바라본 옥천의 풍경은 훗날 시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 됐다.
들판을 스치는 바람과 조용히 흐르는 개울물, 저녁 햇살 아래서 울던 얼룩배기 황소는 그저 평범한 자연 풍경에 그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세월이 흐른 뒤 한국 문학사의 대표작 「향수」로 다시 태어났다.
◆꿈을 키운 배움의 공간, 죽향초등학교
정지용의 문학적 성장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현재의 죽향초등학교다. 그는 옥천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하며 배움의 기초를 다졌고, 1914년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가 새로운 배움의 길을 걸었다. 이후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죽향초등학교는 한 소년의 꿈이 싹튼 곳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한 뿌리를 품은 공간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정지용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시인의 문학적 출발점을 되새길 수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 만나는 '향수'의 기억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에 자리한 정지용 생가는 1996년에 복원됐다. 소박한 옛집과 작은 마당이 어우러져 시인의 유년 시절과 대표작 「향수」를 연결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초가지붕과 흙담, 좁은 마당을 둘러보면 당시 시골의 소박한 주거 풍경을 떠올리며 정지용이 보냈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생가를 대표하는 볼거리는 「향수」에 등장하는 얼룩배기 황소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시 속 풍경이 실제 공간에 구현돼 있어 방문객들이 작품을 더욱 친근하게 느끼도록 한다. 생가 앞 실개천과 개천가 담장에 그려진 벽화도 시 속 고향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생가 마당에는 소년을 등에 업은 얼룩배기 황소와 어린 송아지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자리해 방문객을 맞는다.
정지용이 사랑했던 것은 거대한 풍경이나 특별한 사건만이 아니었다. 매일 마주하던 자연과 가족의 온기, 고향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그의 시를 이루는 소중한 소재였다. 그는 일상의 풍경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빚어냈다. 그 덕분에 그의 작품은 특정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시인
2005년 5월 15일 개관한 정지용문학관에서는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문학 전시와 영상·체험 공간을 통해 「향수」뿐 아니라 「유리창」, 「백록담」 등 주요 작품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가가 시인의 고향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문학관은 그곳의 기억이 어떻게 시와 언어로 발전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정지용의 시가 특별한 이유는 감정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선명한 이미지와 절제된 언어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데 있다. 「향수」는 고향이 그립다고 직접 말하는 대신 실개천과 들판, 황소와 노을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독자는 그 풍경을 따라가며 저마다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유리창」 역시 슬픔을 격렬하게 외치기보다 차가운 유리창과 밤의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아픔을 드러낸다. 이처럼 정지용은 우리말의 감각과 표현 가능성을 넓히고,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경지로 끌어올린 시인이었다.
문학관을 둘러본 뒤에는 인근 지용문학공원과 향수길을 함께 걸어볼 만하다. 옥천읍 구읍 일대에 자리한 지용문학공원은 정지용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고 「향수」에 담긴 고향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생가와 문학관을 중심으로 주변 골목까지 여유롭게 산책하면 1~2시간 정도의 문학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품은 문학인의 길
정지용은 시인이자 교육자였으며,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준 문학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문인과의 문학적 인연은 한국 현대문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격동의 시대와 비극을 비켜 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정지용은 이후의 행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은 1988년 해금 이후 다시 폭넓게 읽히고 평가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정지용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용제, 문학으로 피어나는 옥천의 자부심
옥천은 정지용의 문학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올해 제39회를 맞은 지용제는 시인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고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대표적인 문학 행사다.
지용제 기간에는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지용문학공원 등 행사장 일원에서 시 낭송과 백일장, 각종 경연과 공모전, 전시회, 축하 음악 공연, 문학 강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주민뿐 아니라 전국의 문학인과 문학 지망생, 「향수」에 매료된 음악 애호가들이 함께하는 축제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해 시인의 작품 세계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지용신인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 시상은 축제의 의미를 더한다. 시인의 문학적 유산을 오늘의 문학으로 이어 가고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용제는 주최·주관 기관과 단체, 지역 주민의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문학 축제다. 정지용의 문학적 위상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옥천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 관광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 구읍을 걷다 보면 시인의 삶과 작품이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며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정지용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고향은 떠나도 기억은 남는다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장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살아 숨 쉬는 기억이기도 하다.
정지용은 옥천에서 태어나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고향의 풍경을 시로 빚어냈다. 그가 남긴 작품은 문학적 유산을 넘어 우리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자연과 따뜻한 삶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 주는 마음의 쉼터다.
오늘도 옥천의 바람은 불고 실개천은 흐른다. 정지용의 시는 「향수」의 선율처럼 우리 곁에 머물며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조용히 일깨운다.
대전일보 육종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