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24도1195 판결 뒤 '급제동 불가피' 항변 안 통해 황색신호 진입 사고는 12대 중과실, 잔여시간 신호등은 백지화
정지선 앞에서 노란불이 켜진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뒤차가 밀고 들어올 것 같고, 그대로 지나면 카메라가 번쩍인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이 몇 초를 교통공학에서는 '교차로 딜레마존'이라 부른다. 문제는 이 구간에 대한 법의 답이 2년 전 확정됐다는 점이다. 멈춰라, 멈출 수 없어도 멈춰라.
◆ 정지선 8.3m 앞 노란불, 대법원은 "유죄"
사건은 경기 부천IC 교차로에서 났다. 제한속도 시속 40㎞ 도로를 61㎞로 달리던 승용차 운전자가 좌회전 진입 직전 황색등을 보고도 그대로 들어갔다. 이어 적색 신호를 어기고 달려온 오토바이와 부딪쳤다.
황색등이 켜진 순간 차량은 정지선에서 8.3m 떨어져 있었다. 그 속도에서 차를 세우려면 30m 넘게 필요했다. 1심과 2심은 이 점을 들어 무죄로 봤다. 급제동하면 교차로 한복판에 서거나 뒤차에 받힐 위험이 더 크다는 논리였다.
대법원은 2024년 4월 이 판단을 뒤집었다. 정지거리가 정지선보다 길더라도 교차로 진입 전에 황색등이 켜졌다면 멈추지 않은 것은 신호위반이라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고의 이유와 별개로 운전자의 신호위반 여부를 판단한 것으로, 황색등이 켜졌을 땐 교차로 진입 전 차량 운전자는 선택의 여지 없이 정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노란불은 3초, 멈추는 데는 3.58초
판결을 두고 논란이 인 이유는 물리 법칙과 어긋나 보여서다. 경찰청 교통신호기 설치·관리 매뉴얼상 국내 대부분 교차로의 황색신호는 주행속도와 상관없이 3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2024년 5월 체험교육센터에서 실험한 결과, 시속 60㎞ 차량이 급제동해 완전히 서기까지 3.58초가 걸렸다.
시속 50㎞라면 가까스로 황색 시간 안에 선다. 시속 70㎞면 6초 가까이 필요하다. 노란불이 꺼지고 빨간불이 켜진 뒤에도 차는 굴러간다는 뜻이다. 미국 교통공학회는 정지선까지 2~5초 남은 구간을 아예 교차로 딜레마존으로 정의해 황색 시간 설계에 반영한다.
한국의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은 다르다. 황색등이 켜지면 정지선 직전에 서고, 이미 교차로에 들어선 차만 신속히 빠져나가라고만 적혀 있다. 안전하게 설 수 없으면 통과를 허용하는 유엔 도로표지협약의 예외 조항은 없다. 운전자 525명에게 물은 2024년 6월 컨슈머인사이트 조사에서는 열에 여섯이 '무조건 정지' 판결에 동의하지 않았다.
◆ 7만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노란불 통과가 카메라에 찍히면 승용차 기준 과태료 7만원이 날아온다. 경찰관에게 현장에서 걸리면 범칙금 6만원에 벌점 15점이 붙는다. 어린이보호구역이면 금액은 두 배 가까이 뛴다.
사고가 나면 차원이 달라진다. 신호위반 인명사고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12대 중과실이다. 이에 따라 종합보험에 들었어도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으며 법정형은 5년 이하 금고다. 보험 과실 산정에서도 손해보험협회 인정기준은 황색신호에 진입한 차량의 기본 과실을 100%로 잡는다. 상대가 잘못했어도 일단 신호위반 쪽이 다 뒤집어쓰는 구조다.
◆ 블랙박스가 가려 줄 유일한 선: 정지선
그래서 황색등 사고에서 다툴 수 있는 지점은 사실상 하나다. 노란불이 켜진 순간 내 차가 정지선을 넘었는가, 넘지 않았는가. 시행규칙이 '이미 진입한 차'에만 통과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블랙박스 영상에서 신호 전환 시점과 차량 위치가 과실 유무를 가른다.
정지선 앞에서 황색등을 봤다면 속도가 얼마였든 항변의 여지는 사라졌다. 부천 사건처럼 8m 남짓 남았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운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교차로에 다가설수록 황색 시간 안에 설 수 있는 속도로 줄이는 것뿐이다.
◆ 카운트다운 신호등은 왜 떼어냈나
판결의 빈틈을 메울 대안으로 경찰은 차량 신호등에 남은 시간을 숫자로 보여 주는 잔여시간 표시기를 꺼냈다. 대구 달성군 주단교차로, 충남 천안시 2곳, 경기 의정부 서부교차로 등 4곳에 달아 시험했다.
결과는 양날이었다. 한국도로교통공단이 2024년 12월 내놓은 운행 행태 분석을 보면 신호위반은 37% 줄었지만 정지선 위반은 40% 늘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급제동하거나, 남은 시간에 통과하려고 가속하는 운전자가 함께 늘어난 것이다. 경찰청 교통안전심의위원회는 정식 도입을 철회했고 장치는 철거됐다.
경찰청 관계자는 "예측 출발 및 과속을 막기 위해 신호가 바뀌기 직전 5초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잔여시간 표시장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과가 있었지만 잔여시간 제공 자체는 운전자에게 편의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는 강릉시와 서울·인천·대구 등 10여 개 지자체 주요 교차로에서 내비게이션 화면을 통해서만 신호 정보를 주고 있다.
◆ 레이더 신호등과 개정안, 다음 고비
남은 카드는 두 가지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연구 중인 레이더 기반 스마트 신호제어는 정지선 50m 안에 차량이 들어오면 녹색을 1~2초 연장해 교차로 딜레마존 자체를 없애는 방식이다. 국회에는 정점식 의원이 대표발의한 딜레마존·예비 정지선 법제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올라가 있어 11월 행정안전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
그 사이 단속은 멈추지 않는다. 한병도 의원실이 2024년 국정감사 때 공개한 경찰청 자료를 보면 2020년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신호위반 공익신고 처리 건수는 319만 건이 넘는다. 같은 기간 신호위반 공익신고로 부과된 과태료는 1723억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