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납국세 열람제도, 보증금 1천만원 넘으면 집주인 동의 없이 세무서서 확인

입력 2026-10-15 23: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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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들고 전국 세무서 가면 동의 없이 열람…복사·촬영은 금지 확정일자 뒤 당해세는 보증금이 먼저…계약 전엔 여전히 동의 필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등기부등본은 깨끗했다. 그런데 집이 공매에 넘어갔다. 집주인이 밀린 종합부동산세 수천만원이 세입자 보증금보다 먼저 빠져나갔다. 기획재정부가 세법을 고치면서 든 사례다. 가을 이사철, 등기부만 보고 계약하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없다.

◆ 등기부에는 안 찍히는 빚

세금 체납은 등기부에 나오지 않는다. 과세관청이 압류 등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흔적이 없다. 세입자가 등기부를 아무리 꼼꼼히 봐도 집주인이 세금을 얼마나 밀렸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빚의 규모는 작지 않다. 강민국 의원실이 지난 11일 공개한 국세청 자료를 보면 올해 6월 말 누적 국세 체납액은 116조원을 넘는다. 건수로는 564만건이 넘는다.

경매나 공매가 열리면 이 세금이 보증금과 순서를 다툰다.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국회에 낸 자료 가운데 가장 최근 집계인 2016년부터 5년간 현황을 보면 국세 체납에 밀려 세입자가 떼인 보증금은 335억원이다. 같은 자료를 보면 공매 주택에서 세입자가 못 돌려받은 보증금은 2022년 들어 여덟 달 만에 125억원으로 전년 한 해치를 넘어섰다.

◆ 계약서 한 장이면 세무서 문이 열린다

2023년 4월부터 도입된 미납국세 열람제도에 따라 보증금 1천만원이 넘는 계약을 한 세입자는 집주인 동의 없이 미납 국세를 볼 수 있다. 계약서를 들고 세무서에 가면 된다. 집이 있는 곳의 관할 세무서가 아니어도 된다. 전국 어느 세무서든 받아준다.

열람할 수 있는 기간은 계약일부터 임대차 시작일, 즉 입주일까지다. 잔금을 치르기 전에 가야 한다. 지방세도 같다. 시·군·구청 세무부서나 주민센터에서 집주인의 미납 지방세를 전국 합산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기록은 남길 수 없다. 서류를 내주지 않고, 복사도 사진 촬영도 안 된다.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보고 나와야 한다. 세무서는 세입자가 열람했다는 사실을 집주인에게 알린다.

집주인이 스스로 신고하는 세금은 바로 잡히지 않는다. 신고기한이 지나고 30일이 더 지나야 열람 대상에 오른다. 종합소득세는 60일이다. 신고 직후에 열람하면 체납이 안 보일 수 있다.

◆ 확정일자와 법정기일, 하루가 가른다

세금은 원칙적으로 보증금보다 힘이 세다. 집에 직접 붙는 종합부동산세·상속세·재산세 같은 당해세는 더 그렇다. 세법을 고치기 전에는 세입자가 확정일자를 먼저 받아도 당해세가 앞섰다.

지금은 다르다. 세입자 확정일자보다 당해세의 법정기일이 늦으면, 그 세금에 돌아갈 몫만큼 보증금을 먼저 배분한다. 지방세 당해세도 같다. 집주인이 바뀌어도 전 집주인이 밀린 세금 한도 안에서만 세금이 우선한다.

그래도 순서 싸움은 남는다. 법정기일은 고지서를 보낸 날이나 신고한 날이다. 이 날이 확정일자보다 하루라도 빠르면 세금이 먼저다.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는 확정일자를 받은 다세대 빌라 세입자 세 명이 집주인의 증여세 체납 법정기일에 밀려 보증금을 전부 잃었다. 공인중개사를 상대로 낸 소송도 졌다.

그래서 최후의 방어선이 소액임차인 최우선변제다. 2023년 시행령 기준 서울은 보증금 1억6500만원 이하면 최대 5500만원을 선순위 채권보다 먼저 받는다.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광역시, 그 밖의 지역 순으로 기준과 한도가 낮아진다. 주택가액의 절반까지만 인정된다.

◆ 계약금 걸기 전엔 못 본다

가장 큰 구멍은 순서다. 동의 없는 열람은 계약서를 쓴 뒤에만 된다. 계약 전에는 집주인의 서명 동의서와 신분증 사본이 있어야 한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가계약금을 보내기 전 체납을 걸러낼 길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한다.

계약 뒤 체납을 확인해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계약서에 '체납 확인 시 무효'나 위약금 특약이 없으면 계약금 반환을 두고 다퉈야 한다. 열람 사실이 집주인에게 통보되니 입주 전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홈택스 같은 온라인 열람은 지원되지 않아 평일 낮에 세무서를 직접 찾아야 한다.

제도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부산시가 2024년 5월 전세사기 피해자를 조사했더니 열에 여섯(59.7%)은 집주인 체납을 열람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동의가 꼭 필요하던 2017년부터 5년 반 동안 전국 열람 신청은 802건에 그쳤다. 같은 기간 찍힌 확정일자의 0.007%다.

◆ 다음 고비

동의 없는 열람 기간을 임대차 종료일까지 늘리는 국세징수법 개정안은 다음 달 정기국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