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들고 전국 세무서 가면 동의 없이 열람…복사·촬영은 금지 확정일자 뒤 당해세는 보증금이 먼저…계약 전엔 여전히 동의 필요
등기부등본은 깨끗했다. 그런데 집이 공매에 넘어갔다. 집주인이 밀린 종합부동산세 수천만원이 세입자 보증금보다 먼저 빠져나갔다. 기획재정부가 세법을 고치면서 든 사례다. 가을 이사철, 등기부만 보고 계약하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없다.
◆ 등기부에는 안 찍히는 빚
세금 체납은 등기부에 나오지 않는다. 과세관청이 압류 등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흔적이 없다. 세입자가 등기부를 아무리 꼼꼼히 봐도 집주인이 세금을 얼마나 밀렸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빚의 규모는 작지 않다. 강민국 의원실이 지난 11일 공개한 국세청 자료를 보면 올해 6월 말 누적 국세 체납액은 116조원을 넘는다. 건수로는 564만건이 넘는다.
경매나 공매가 열리면 이 세금이 보증금과 순서를 다툰다.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국회에 낸 자료 가운데 가장 최근 집계인 2016년부터 5년간 현황을 보면 국세 체납에 밀려 세입자가 떼인 보증금은 335억원이다. 같은 자료를 보면 공매 주택에서 세입자가 못 돌려받은 보증금은 2022년 들어 여덟 달 만에 125억원으로 전년 한 해치를 넘어섰다.
◆ 계약서 한 장이면 세무서 문이 열린다
2023년 4월부터 도입된 미납국세 열람제도에 따라 보증금 1천만원이 넘는 계약을 한 세입자는 집주인 동의 없이 미납 국세를 볼 수 있다. 계약서를 들고 세무서에 가면 된다. 집이 있는 곳의 관할 세무서가 아니어도 된다. 전국 어느 세무서든 받아준다.
열람할 수 있는 기간은 계약일부터 임대차 시작일, 즉 입주일까지다. 잔금을 치르기 전에 가야 한다. 지방세도 같다. 시·군·구청 세무부서나 주민센터에서 집주인의 미납 지방세를 전국 합산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기록은 남길 수 없다. 서류를 내주지 않고, 복사도 사진 촬영도 안 된다.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보고 나와야 한다. 세무서는 세입자가 열람했다는 사실을 집주인에게 알린다.
집주인이 스스로 신고하는 세금은 바로 잡히지 않는다. 신고기한이 지나고 30일이 더 지나야 열람 대상에 오른다. 종합소득세는 60일이다. 신고 직후에 열람하면 체납이 안 보일 수 있다.
◆ 확정일자와 법정기일, 하루가 가른다
세금은 원칙적으로 보증금보다 힘이 세다. 집에 직접 붙는 종합부동산세·상속세·재산세 같은 당해세는 더 그렇다. 세법을 고치기 전에는 세입자가 확정일자를 먼저 받아도 당해세가 앞섰다.
지금은 다르다. 세입자 확정일자보다 당해세의 법정기일이 늦으면, 그 세금에 돌아갈 몫만큼 보증금을 먼저 배분한다. 지방세 당해세도 같다. 집주인이 바뀌어도 전 집주인이 밀린 세금 한도 안에서만 세금이 우선한다.
그래도 순서 싸움은 남는다. 법정기일은 고지서를 보낸 날이나 신고한 날이다. 이 날이 확정일자보다 하루라도 빠르면 세금이 먼저다.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는 확정일자를 받은 다세대 빌라 세입자 세 명이 집주인의 증여세 체납 법정기일에 밀려 보증금을 전부 잃었다. 공인중개사를 상대로 낸 소송도 졌다.
그래서 최후의 방어선이 소액임차인 최우선변제다. 2023년 시행령 기준 서울은 보증금 1억6500만원 이하면 최대 5500만원을 선순위 채권보다 먼저 받는다.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광역시, 그 밖의 지역 순으로 기준과 한도가 낮아진다. 주택가액의 절반까지만 인정된다.
◆ 계약금 걸기 전엔 못 본다
가장 큰 구멍은 순서다. 동의 없는 열람은 계약서를 쓴 뒤에만 된다. 계약 전에는 집주인의 서명 동의서와 신분증 사본이 있어야 한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가계약금을 보내기 전 체납을 걸러낼 길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한다.
계약 뒤 체납을 확인해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계약서에 '체납 확인 시 무효'나 위약금 특약이 없으면 계약금 반환을 두고 다퉈야 한다. 열람 사실이 집주인에게 통보되니 입주 전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홈택스 같은 온라인 열람은 지원되지 않아 평일 낮에 세무서를 직접 찾아야 한다.
제도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부산시가 2024년 5월 전세사기 피해자를 조사했더니 열에 여섯(59.7%)은 집주인 체납을 열람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동의가 꼭 필요하던 2017년부터 5년 반 동안 전국 열람 신청은 802건에 그쳤다. 같은 기간 찍힌 확정일자의 0.007%다.
◆ 다음 고비
동의 없는 열람 기간을 임대차 종료일까지 늘리는 국세징수법 개정안은 다음 달 정기국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