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의 미각기행] 미각기행 다방르네상스 이야기

입력 2026-09-09 13: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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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다방은 '문화예술아지트'
화가 이인성 1936년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 초입 '아루스다방' 개업
예술가들 다방으로 넘어오면 온갖 허세·허영도 대접 받을 수 있어

호주머니 사정이 좋을 수가 없었던 그 시절 예술가들은 일단 다방으로 넘어오면 온갖 허세와 허영도 번듯하게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을 수가 없었던 그 시절 예술가들은 일단 다방으로 넘어오면 온갖 허세와 허영도 번듯하게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다방=예술사랑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의 문화예술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다방이란 '문화예술아지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발효한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을 수가 없었던 그 시절 예술가들은 일단 다방으로 넘어오면 온갖 허세와 허영도 번듯하게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다방=예술사랑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망국의 주인공이기도 한 고종도 그런 사람이었다.

고종이 덕수궁 안에 마련했던 커피하우스격인 정관헌.
고종이 덕수궁 안에 마련했던 커피하우스격인 정관헌.

1896년 2월 11일 밤. 고종은 왕세자(순종)와 함께 일본의 눈을 피해 서울시 중구 정동 덕수궁 근처 러시아공사관(당시는 '아관'(俄館)이라 부름)으로 피신한다. 한국 다방사의 1막1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아관에서 보낸 1년여 동안 고종은 식사 후에도 왕세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커피를 마실 정도로 커피 마니아가 된다. 고종이 스스로 커피를 찾은 건 물론 아니다. 고종에게 접근한 여성 로비스트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한테 발탁돼 구한말 한국 사교계에 등장한 독일 출신 손탁이었다. 고종은 자기한테 커피를 소개해주고 적적할 때 말벗까지 되어준 벽안의 여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1902년 아관 옆에 2층 적벽돌조 손탁호텔까지 만들어준다. 고종의 속맘을 헤아린 손탁은 1층에 사교클럽을 겸한 커피숍을 꾸미는데, 거기가 한국 최초의 다방격인 정동구락부가 된다. 일본은 1726년쯤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커피를 소개받았고, 일본 최초의 커피숍은 1886년 도쿄에 '세수정'(洗愁亭)이다. 일본에선 다방이 '기사댕'(喫茶店)으로 불렸다.

화가 이인성이 아카데미 극장 근처에 문을 열었던 아루스다방 개업 안내 전단.
화가 이인성이 아카데미 극장 근처에 문을 열었던 아루스다방 개업 안내 전단.
백석 시인(사진 맨 오른쪽)과 아루스에서 담소 중인 이인성.
백석 시인(사진 맨 오른쪽)과 아루스에서 담소 중인 이인성.

◆서울에는 이상 대구에는 이인성
1930년대 두 명의 천재 예술가가 서울과 대구에서 다방을 개업한다. 당시 예술가에게조차 난해했던 '오감도'란 시를 발표했던 시인 이상은 1933년 서울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연다. 대구시 중구 태평로에서 태어난 화가 이인성은 1936년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 초입에서 '아루스다방'의 문을 연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아껴주던 대구여고보(경북여고) 교장 시라가 주키지(白神壽吉)의 중매로 남산병원장 김재명의 장녀 옥순과 결혼한다. 김 원장은 맏사위가 술독에서 빠져나와 명화를 그려주길 바라는 맘에서 병원 옥상에 그를 위한 아틀리에를 만들어준다. 대구에선 첫 화실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명사였던 이인성은 '반월당'과 함께 일제 대구의 대표적 백화점이 던 '무영당' 사장 이근무(李根茂)와 계성고교 재학시절 '뜸북새'를 작곡한 음악평론가이자 동화작가인 윤복진 등과 교유했다.

밤이 돼 무료하면 아틀리에 맞은편 고려예식장 옆 골목에 있던 민족시인 이상화 사랑채로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아틀리에 손님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장인어른한테 미안하기도 해서 자기 손님들을 위한 별도의 사랑방이 절실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아루스가 탄생한 것이다.

개업 초대장을 보면 '아루스는 아담한 객실, 심령의 안식처, 예술의 전당, 가두의 도서실'이라 했다. 이듬해 겨울 백석 시인과 그 다방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런데 그 다방에서 끔찍스러운 사건(매일신보에 기사 게재)이 1937년 10월 28일 오후 6시에 발생한다. 이인성은 선민의식이 너무 강했고 술을 먹으면 인사불성이었다. 그가 워낙 도도하게 놀자 수창소학교 선배이자 화가지망생이던 김부돌(金扶乭)이 심통을 부렸다. '너 한번 당해봐'란 심산으로 25세 때 일본제전에 입선한 400호 크기의 '한정'(閑庭)의 중앙 상단부를 칼로 30cm 이상 찢자, 분을 삼키지 못한 이인성이 김부돌의 칼을 빼앗아 선배의 가슴을 찔렀다. 그 충격으로 이인성은 한동안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찾은 이인성은 정형수술 전문의처럼 '한정'을 정성스럽게 봉합해준다.

아루스다방 탁자는 검정색이었으며, 빅타회사에서 만든 유성기, 여종업원까지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인성은 남산병원을 떠나 아루스다방 옆으로 아틀리에를 옮겼다. 하지만 그는 알코올에 중독된 듯 그림보다 술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1940년대초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거처를 마련했지만 주사는 더욱 심해갔고 급기야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겨울, 서울 시내 술집에서 마포경찰서 교통순경 김성환과 사소한 시비를 벌이다가 피격돼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인성이 대구에 남기고 간 아루스다방은 중앙로 YMCA 바로 북편 아루 제과점을 낳았으며, 이화진 등이 다방의 명맥을 잇다가 1960년대 의학박사 박태환이 인수해 다방을 허물고 그 자리에 박내과를 세웠다.

◆50년대 다방의 추억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도 대구와 인연이 깊다. 1951년 대구시 중구 북성로 31, 그가 모나미 다방에 등장했다. 죽순문학회(광복 직후 대구에서 태동한 한국 첫 문학회) 주최 한솔 이효상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빛내기 위해서다. 그날의 사진 속에는 공초와 청록파의 한 사람이었던 조지훈, 구상시인, 죽순문학회의 산파역 이윤수 시인 등이 축하객으로 자리했다.

공초가 대구에서 머문 기간은 20여년. 공초는 일제 때 서울 남산에서 수주 변영로, 횡보 염상섭과 대낮에 발가벗고 스트립쇼를 벌여 살아가는 재미를 잃은 한국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적이 있었다. 1927년 약전골목 구일당 한약방 주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방한상(方漢相) 집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장발이었다. 남산동의 한 여관에 진을 친 공초는 고월 이장희·이상화·백기만 시인과 교우했고 상주 출신 퇴기 덕분에 주막 상주집 골방을 차고앉을 수 있었다.

그가 진을 치고 있던 골방은 아무리 많은 지인이 찾아와도 모두 수용할 수 있어 일명 '고무줄방'으로 불렸다. 매일 얻어먹고 사는 자신이 한스러웠던지 공초는 상화의 도움을 받아 '아세아'란 이름의 술집을 경영한다. 그러나 공초와 돈의 관계는 물과 기름과 같았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몇 달 만에 빚을 안고 폐업을 하고 만다. 아세아와 거래한 주류도매점 안동옥의 사장은 그가 유명 시인이란 사실을 알고 이색 제안을 한다. 안동옥 광고문안을 빚을 청산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공초도 흔쾌히 허락한다.

'거품과 같은 인생이다. 어둡고 헛되게 살 것인가. 불안한 세상을, 짧은 인생을 웃으며 명랑하게 살자. 새 봄이다. 명랑한 인생이다. 부라보. 희망의 잔을 비워라. 강하게 즐겁게 짧은 인생을 즐기자.'

해방 직후 대구에서 가장 모던한 다방이었던 북성로 초입의 백조다방 외관과 이삼근 사장.
해방 직후 대구에서 가장 모던한 다방이었던 북성로 초입의 백조다방 외관과 이삼근 사장.

◆백조다방의 이삼근
해방 직후 대구에서 처음으로 모던한 다방이 있다. 북성로 초입의 '백조'이다. 북성로 1가 21번지. 2020년까지만 해도 옛 향촌동 상업은행 대구지점에서 뉴대구호텔을 향해 170여 보를 걸으면 북성로 길과 만나고 좌회전해서 20여m 가면 오른편에 신진이발기구상회가 보였다. 거기가 47년 1월 1일 개업한 백조다방 자리다. 신진상회 바닥엔 바둑알만한 갈색 타일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었고, 20개의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당시 주인 이삼근이 생활했던 10여평 규모의 거실도 먼지에 쌓인 채 보존돼 있었다.

일제 때 백조 자리엔 바이올린을 잘 켰던 주인 무라세가 경영했던 찻집 '아오이'(靑)가 있었다. 독신인 무라세는 음질이 좋은 빅타 축음기와 다량의 SP레코드판을 갖고 있었고 가끔 동산병원 옆에 자리했던 개신교 선교사 자녀들에게 바이올린 레슨도 했다. 아오이는 골기와 지붕이 인상적인 현재 유풍문구사 맞은편 가게츠(花月), 송죽극장 맞은편 쓰바사(翼)와 함께 일제시대 대표적 스낵형 다방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삼근은 도쿄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져 대구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지도가 있었다. 그는 깔끔하고 독선적이며 프라이드가 매우 강해 언뜻 무사적 풍모도 엿보였다. 당시 대구에선 이삼근 자체가 화제의 인물이었다. 복장도 매우 파격적이었고 늘 빨간 스카프, 베레, 지팡이가 늘 3박자로 따라다녀 행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45∼46년 아오이는 잠시 술집으로 변했다가 이삼근이 '낭만의 백조시대 '를 연다. 가게 이름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의 백조에서 따왔다. 1층은 다방, 2층은 거실로 사용됐다. 2층 외벽은 모두 42개의 유리창으로 치장됐다. 홀에는 12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앞뒤로 머리까지 기댈 수 있는 높은 등받이 의자 4개가 놓여있었다. 손님들은 장방형 구조에 홀 양편으로 흡사 열차 객실처럼 의자를 배치해 백조를 '열차다방'이라고 불렀다.

2000년대 이후 제2의 백조다방이 생겼지만 도심재개발 과정에 사라지고 말았다.
2000년대 이후 제2의 백조다방이 생겼지만 도심재개발 과정에 사라지고 말았다.

백조는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손님이 들어와도 이삼근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커피와 주스, 우유만 팔고 술은 팔지 않았다. 담갈색 양 벽엔 김법룡 등 선전(鮮展) 입상작, 기증한 일본 화가 마츠우라 히데오(松浦秀雄)의 그림, 한 소련인이 그린 그림 '코카서스 부인의 성장' 등 68년 당시 모두 14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음악애호가였던 이삼근은 시끄럽다며 축음기도 멀리했다. 다만 피아니스트인 외아들 이공주(李公主)를 위해서는 그랜드 피아노를 마련했다. 이 피아노가 오랫동안 대구의 명물이 된다. 1965년 연주차 대구에 들른 독일 피아니스트 루스 스렌치스카도 연습 후 사인을 남겼고 안동에서 태어난 대구의 1세대 음악가로 60년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한 권태호(1903∼72), 계산동에서 태어나 46년 그 유명한 노래의 날개, 금잔디를 작곡한 김진균(1925∼86),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와 효성여대·계명대 음대 학생들의 연습공간으로 애용됐다. 미국 여성과 결혼한 이공주는 가끔 백조에서 아버지의 바이올린 반주에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이삼근과 점점 멀어졌고 결국 미국으로 귀화하고 만다. 이공주는 연주인으로 대성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조율사로 살아갔다. 이삼근의 말년은 무척 쓸쓸하고 고독했다. 급증하는 고급 다방한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2년쯤 문을 닫는다. 훗날 제2의 백조다방이 생겼지만 도심재개발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wind30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