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속으로] 직접 그리고 새겨 찍어낸, 구자현이 보여주는 판화의 정수

입력 2026-08-21 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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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목판화부터 석판화·스크린 등
각 판화 특징 살린 작품 한 자리에
자화(自画)·자각(自刻)·자접(自摺)
50년 구자현 판화 세계 담은 전시
9월 18일까지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구자현 개인전 전경. 이연정 기자
구자현 개인전 전경. 이연정 기자
구자현 개인전 전경. 이연정 기자
구자현 개인전 전경. 이연정 기자
구자현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구자현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지금의 '판화'는, 대부분 유명 화가의 복제성 디지털 프린트 판화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원화의 이미지를 프린트해 고가에 유통하는 방식이 판화 시장을 잠식한 지금, 판화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갤러리 히든스페이스(대구 수성구 들안로40길 7)에서 열리고 있다.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는 50년 가까이 판화만을 연구해왔다. 여기에서 판화는 작가가 스스로 판에 그린 뒤 새기고, 직접 찍어내는 '자화(自画)·자각(自刻)·자접(自摺)'의 창작 판화를 말한다.

갤러리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디지털 복제가 보편화된 시대, 손의 행위와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판화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동시대에 판화가 나아갈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작품"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1980년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교토 세이카대학 판화과, 큐슈산교대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판화에 대한 연구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도서관에서 우키요에 판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한지 위에 수성물감으로 칠해도 번지지 않는 기법 등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대구에서 직물공장을 하셔서 어릴 적부터 옷감에 색과 문양을 판으로 찍어내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판화가 끌린 데는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유학을 떠난 그는 26세가 되던 해, 도쿄 긴자의 시로다 화랑에서 꼭 전시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시로다 화랑은 당시 판화를 취급하는 제법 큰 규모의 화랑이었고, 특히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의 판화 에디션을 독점 관리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화랑에 전화를 하니, 작품을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급하게 결혼할 때 혼수로 해온 보석을 팔아서 프레스기를 샀죠. 추운 겨울에 가로 100, 세로 70cm의 큰 작업을 제작하느라 꽤 고생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시로다 화랑에서 이우환 이후에 유일하게, 계속 전시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당시 그의 전시는 마이니치신문에 크게 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작가는 "기자가 내 작품을 두고 '손으로 했지만 손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라고 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2014년, 시로다 화랑의 대표 시로다 사다오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는 "시로다 대표가 '작가 나이 60은 아직 아기다. 지금부터 좋은 작업을 열심히, 많이 해라'고 하고는 며칠 후 돌아가셨다"며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칠십이 넘고 보니 그걸 실감한다. 이제서야 그림이 좀 보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구자현 개인전 전경. 히든스페이스 제공
구자현 개인전 전경. 히든스페이스 제공
구자현 개인전 전경. 히든스페이스 제공
구자현 개인전 전경. 히든스페이스 제공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구자현 작가. 이연정 기자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구자현 작가. 이연정 기자

◆"나중엔 누군가 알아줄 것이라 확신"

그의 작품을 마주한 이들은 2m가 넘는 크기에 먼저 놀란다. 종이를 이어 붙인 것도 아니다. 거대한 한 장의 종이는 판으로 찍어냈다고 믿기 어려울만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물감을 입고 관람객을 맞는다.

그는 "밋밋한 것,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문학이나 다 무용지물"이라며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정한 힘으로 스퀴지를 밀어야하는데, 작품 크기가 150호 이상 되면 건장한 남자 두 명으로는 소용 없다. 물감을 동일하게 찍을 수 있는 대형 스퀴지를 1천만원 넘게 들여 직접 만들었다. 질 좋은 대형 종이도 해외에서 1억원 치를 한번에 사갖고 온다"고 말했다.

반세기 가량 이어온 그의 화업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미술시장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는 분야인데다 공간 확보부터 재료에 투입되는 비용, 인력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기 때문.

"넉넉하지 않은 시절에도 작품 재료만큼은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확고한 기준을 고수했습니다. 강사료나 작품을 판매한 비용이 들어오면 또 다음 작품을 위한 제작비로 썼어요. 그래도 내가 이걸 꼭 해야겠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해온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려웠지만 '나중에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죠. 특히 판화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어가는 요즘, 누구나 할 수 없는 이 판화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특히 그는 석판화와 목판화, 스크린의 특징을 잘 살려서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칼 등으로 새긴 질감이 잘 나타난 목판화와 물의 반발 작용이 드러난 석판화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스크린 판화의 경우 색면의 중첩이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하게 표현돼있어, 마치 세 명의 사람이 따로 작업한 듯한 느낌을 준다.

박진향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대표는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수십년을 작업에만 지독하게 몰두해 온 작가"라며 "그간 잘 알려지지 않고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그 노고와 정성, 그리고 판화라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를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이어지며 일요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