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성두...중국 각지에 산재한 신석기 문화 묘사한 말
중국 역사학계, 하(夏)나라를 실존했던 국가로 만드는 데 진심
중국 각지의 신석기문화를 일군 주체는 동이족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수도가 있던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시 언사구(偃師區)에는 이리두유지박물관(二里頭遺址博物館)이 있다. 최근 들어 중국은 이리두를 하·은·주(夏殷周) 3대의 첫 머리인 하나라의 도읍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거대한 박물관 벽면에 '만천성두(滿天星斗)'라는 글을 써놓았다. '만천성두'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중국 현대 고고학의 핵심 인물인 소병기(蘇秉琦)가 중국 각지에 산재한 신석기 문화를 묘사한 말이라 한다. 그러나 북두칠성을 뜻하기도 하는 "두(斗)자"는 하나라를 의미할 것이다. 중국의 수많은 신석기문화가 하(夏)나라로 귀결되어 중국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남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의 시조 "단군부인"에 진심인 반면 중국 역사학계는 하(夏)나라를 실존했던 국가로 만드는 데 진심이다. 그래야 한족(漢族)으로 시작되는 중국사를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앙소문화의 발견과 서래설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이 하남성 민지현(澠池縣) 앙소촌(仰韶村)에서 앙소문화를 발굴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신석기문화가 없다고 여겼다. 앙소촌에서 채도문화가 발굴되자 중국인들은 한족(漢族)의 기원을 밝혀줄 단서가 나왔다고 흥분했다. 오늘날에도 자기 조상이 어디에서 왔으며, 자신들의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명확히 아는 나라나 민족은 극히 드물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인들은 서양학자들의 주장처럼 한족은 서쪽 바빌론이나 이집트에서 왔다고 여겼는데, 이 서래설(西來說)을 증명해 줄 유물들이 쏟아졌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안데르손은 앙소문화가 서쪽에서 왔다는 믿음을 가지고 중국 서북부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일대를 탐사했는데 감숙성 마가요(馬家窯)촌에서 마가요문화를 발굴했다. 그는 마가요의 채도(彩陶)문화가 앙소문화의 채도문화보다 앞선 것으로 여겼으나 오늘날에는 월러드 리비(Willard Libby)의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앙소촌 문화가 마가요촌 문화보다 앞선 것으로 그 선후관계가 바로잡혔다.
◆용과 봉황, 그리고 한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중국 여러 지역에서 신석기문화들이 발굴되면서 적어도 고고학자들은 중국문화가 중국에서 자생했다고 보기 시작했다. 이는 한족(漢族)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변화였다. 문제는 이런 신석기문화들을 한족문화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흔히 용과 봉황을 중국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용·봉황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과 유적은 한족(漢族)문화권이 아니라 이적(夷狄)의 땅으로 여겼던 내몽골 지역에서 발견된다. 사해문화(查海文化 BC 6000~BC 5000)에서는 돌을 쌓아 만든 석소룡(石塑龍)과 용 형상의 부조가 발견되었다. 봉황도 마찬가지여서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BC 5000~BC 4400)에서 출토된 봉황모양의 토기는 가장 이른 시기의 봉황 형상이다.
중국 각지의 신석기문화를 한족의 문화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지자 한족의 기원을 둘러싼 또 다른 견해가 등장했다. 한족의 조상이 청동기시대에 서쪽에서 왔다는 것이다. 신석기문화를 동이족의 문화로 보고, 청동기시대에 서쪽에서 이동해 온 집단이 이리두(二里頭) 문화를 기반으로 하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서 용산문화(龍山文化)를 거쳐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흐름인데 유독 이리두문화만 한족문화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한족과 동이족을 별개의 집단으로 전제하는 한 한족의 기원은 계속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만천성두에서 다원일체로
중국 각지에서 신석기문화가 속속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고고학계는 중원의 선진문화가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여겼다. 하지만 발굴이 거듭될수록 각 지역에서 중원보다 선진적인 신석기문화들이 속속 확인되었다. 이에 소병기는 각 지역의 문화가 독자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는 구계유형론(區系類型論)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기 성장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다는 중국 문명의 다원적 기원설을 제시한 것이다. 소병기의 다원론은 '다원일체(多元一體)'라는 틀 속에서 중국의 여러 지역문화를 하나의 중국문명 형성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현재 중국이 각 지역에 산재한 56개 민족이 오랜 세월 교류하고 융합하면서 '중화민족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주장하는 고대판 '다원일체'가 소병기가 말한 '만천성두'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은 고고학과 고대사도 현재의 중국을 하나로 묶는 학문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중국에게 북방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큰 골칫덩어리이다. 다른 문화는 중화문명의 틀에 넣어서 설명해도 누구도 반발하지 않지만 홍산문화는 대한민국의 민족사학계에서 동이족 문화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병기는 국가의 발전을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는데, 홍산문화 후기는 이미 초기국가인 고국(古國)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았다. 홍산문화 후기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가 우하량(牛河梁) 유적인데, '제단(壇)·여신묘(廟)·적석총(塚)' 등의 '단·묘·총'이 함께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국가권력과 제의(祭儀)가 결합된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여신묘(女神廟)는 능원시(凌源市) 건평현(建平縣) 우하량의 주산(猪山) 정상 부근에 위치한 십자형 구조의 묘이다. 돼지산이라는 뜻의 저산(猪山)을 현지에서는 주산이라고 부른다. 주산은 세 개의 독립된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신묘에서 바라보면 마치 옥저룡(玉猪龍)처럼 보인다. 홍산문화 사람들에게 이 산은 매우 신성한 산이었을 것이다. 여신묘에는 점토로 빚은 실물 크기에 가까운 여성의 두상이 출토되었으며, 눈에는 옥 구슬이 박혀 있었다. 여신상은 묘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좌우에는 새의 날개와 발톱의 조형물과 곰의 발바닥의 형상물이 출토되었다. 하늘을 상징하는 새와 곰을 숭상했던 집단의 신앙이 결합된 모습으로 본다면, 여신묘는 공동의 신성한 존재를 모셨던 조상묘이다. 이 또한 한족의 문화라기보다는 동이족의 문화이기 때문에 근래 중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우하량 단체 관람을 금지시켰다는 말이 떠돈다. 고대 역사유적을 현재의 정치권력의 필요성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이 무리임을 스스로 실토하는 격이다.
◆홍산문화의 옥기와 풍백·운사·우사
반면 홍산문화는 우리의 단군신화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천손족을 상징하고, 웅녀는 곰을 토템으로 삼은 부족을 상징한다. 우하량 여신묘에 나타나는 여성, 새, 곰의 상징은 단군신화의 천손족과 곰부족이 결합한 단군신화와 일치하는 내용으로 모계사회 흔적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를 포함한 중국 동북 각 지역의 여성숭배 사상은 매우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적봉(赤峰)시 오한기(敖漢旗) 일대의 흥륭와 문화에서도 여신상이 발견되었는데 이후 조보구문화와 홍산문화로 전승된다. 여신상의 복부가 풍만한 것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것이다.
우하량 근처의 적석총에서는 옥저룡을 비롯하여 옥거북·옥벽(玉璧)·옥월(玉鉞) 등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었다. 홍산문화 사람들이 옥을 껴묻거리로 사용한 것은 옥을 신과 소통하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옥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관념이 이후에 "예제(禮制)의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홍산문화를 예옥지방(禮玉之邦), 즉 '옥으로 제사를 행하는 나라'라고 부른다. 청나라말 은나라 갑골문을 해석한 왕국유(王國維 1877~1927)는 '예(禮)'의 본래 뜻이 '옥으로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홍산문화 사람들이 옥으로 장례를 치르는 풍습과 딱 맞아떨어진다.
우하량의 적석총에서는 비, 구름, 바람 등을 상징하는 옥기들도 출토되었는데 이 옥기들은 피장자의 가슴과, 손, 복부 부분 등에 놓여 있었다. 소호 금천씨가 새를 숭상해서 관직명까지 새이름으로 지었듯이, 천손족인 환웅족은 하늘과 관계있는 비, 구름, 바람을 관직명으로 삼지 않았을까? 그래서 비 모양의 옥기는 우사(雨師), 구름 모양은 운사(雲師), 바람 모양은 풍백(風伯)의 관직명을 가리킨 것은 아닐까?
또한 홍산문화의 내만기(奈曼旗) 유적지에서는 옥인장(玉印章) 2개가 나왔는데, 중국문물학회 옥기 연구회 이사인 손수도(孫守道 1931~2004)는 홍산문화의 옥인장이 맞다고 했다. 이 옥인장의 크기는 2~4cm이며 목이나 허리에 매달 수 있게 구멍이 있고, 인장 표면에는 글자와 붉은 안료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부호가 새겨진 옥저룡 등도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부호와 인장이 말해주는 것은 당시에 글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인장이 국가 행정 기관이 권한을 행사하는 상징적 도구라는 점에서 국가가 존재했음도 유추할 수 있다.
◆홍산문화와 고조선의 연결성
우리 동이족의 주요한 특징은 조상숭배와 제천의식이다. 천손인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당연히 제천의식을 치렀다.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유적지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圓) 위에 땅을 상징하는 방형(方形)의 제단이 있다. 그 위에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동이족 전통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구현된다. 우하량 제2지점에도 이와 유사한 제천의식의 터가 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홍산문화를 계승한 문화이다. 윤내현(尹乃鉉, 1939~2025) 교수는 하가점하층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로 보았다. 그렇다면 그에 앞선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전사(前史)이자 배달족의 문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서는 물론 중국 각지의 신석기문화를 일군 주체는 동이족이었다. 특히 홍산문화에 나타난 제의와 옥기, 하늘과 동물에 대한 관념은 후대의 역사와 신화 속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 속에는 고조선 이전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문화적 기억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홍산문화와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의 이야기인 동시에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비추어 보는 전사(前史)의 창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