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어느새 가을이다. 강의가 끝난 오후, 햇살 가득한 교정에 선선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들풀들은 온몸을 흔들며 말을 건다. 연구실을 나와 산책하다 경북대학교 미술관의 '표준 사용법' 전시 제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학 안에 번듯한 미술관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서울대 미술관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지역 거점 대학미술관으로서 지닌 내실과 저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언젠가 방명록에서 본 '학교 안 유일하게 숨 쉴 곳'이란 글귀처럼, 이 전시는 숨구멍의 가치를 증명한다.
과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순회전이 작품을 나열하는 백화점식 전시에 그쳤다면, 이번 기획은 그 관성을 유쾌하게 배반한다. 현대인의 초상을 '세탁기의 세 가지 작동 매뉴얼'이라는 영리한 비유 속에 직조해 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생경한 연두색 커튼과 바닥의 안내 글귀가 상식을 뒤집는다. 그 자체로 규격 밖의 자유를 지향하는 몸짓이다. 세탁기 모양의 전시 안내 영상을 지나 만난 첫 번째 풍경은 '자동 모드'이다. 작품마다 각각의 비유로 편리한 매뉴얼에 몸을 맡긴 현대인을 보여준다. AI 알고리즘 속에서만 선택하면서도 정작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맹목적 순응을 꼬집는다. 항공사진에 지번 정보를 명기한 김지은의 '부동산적 풍경화'는 공간을 둘러싼 제도의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두 번째는 '고속 모드'의 폭주다. 표준적 생산성에 도달하기 위해 한정된 시간 안에서 무섭게 탈수하듯, 현대인은 영혼과 에너지를 바짝 쥐어짜 낸다. 거대한 에너지 드링크 캔과 카페인 치사량이 새겨진 박소라의 알약 조각은 이러한 속도전을 서글픈 해학으로 폭로한다.
전시의 정점은 가이드를 끄고 삶의 매개변수를 스스로 조정하는 '사용자 모드'다. 매뉴얼 밖으로 걸어 나와 나만의 궤적을 스스로 그려가는 주체적인 모습이다. 김승영의 작품 '뇌'는 쇠사슬로 뇌를 만들어 빛바랜 저울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무게는 '0'을 가리킨다. 인간의 감정과 삶의 무게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묵화를 그리고 나면 화폭 한편에 빨간 도장을 찍듯, 전시의 낙관을 찍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관객들의 작품이 숨은 그림처럼 전시에 동참하고 있는 광경은 이 전시의 또 다른 백미이다.
미술관을 나와 교정을 바라본다. 취업과 스펙이라는 매뉴얼을 쥐고 바쁘게 오가는 청춘들의 뒷모습이 전시장 속 풍경과 겹친다. 인간의 사유마저 복제하는 AI의 시대라 할지라도, 세상의 표준이 강요하는 궤도를 무조건 추종하며 숨 가쁘게 회전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빽빽한 필선도 사이에 여백이라는 숨구멍이 있어야 비로소 그림이 살아난다. 치열한 삶의 규격 사이에 맑은 쉼표를 찍고, 저마다의 독창적인 붓질로 인생의 다이얼을 돌리는 '사용자 모드'의 주인이 되기를 축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