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데 음식은 갖다준다…이상하고 따뜻한 이웃의 탄생

입력 2026-08-20 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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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

기사 관련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레지가 왔다고?"

전남의 어느 산골마을에 긴급 소집된 주민들 앞에서 윤 선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꺼낸 말이다. 서울에서 귀촌한 젊은 여성 둘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수평마을에서 87년을 살아온 한 씨가 "새 레지가 왔으면 나가 모를 리가 없제"라고 장담한다. 이들이 아는 '레지'는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던 옛말이기 때문이다. 엄숙했던 마을회의는 순식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화제를 모았던 정지아가 4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찌니주의보'를 내놨다. 평균 연령 78세의 산골마을에 귀촌한 30대 여성 성진과 혜진,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별난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성소수자와 이주여성, 귀촌인과 노년층 등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한마을에서 부딪히며 벌어지는 소동을 구수한 입말과 해학으로 풀어낸다.

평화롭던 수평마을에 '찌니주의보'가 발령된 것은 두 사람이 여자끼리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세상의 날 선 시선을 피해 서울을 떠나온 두 사람은 다시 마을 사람들의 편견에 맞닥뜨린다. 윤 선생은 '마귀'를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찌니들은 문을 걸어 잠근다.

기사 관련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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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묘하다. 쫓아내야 한다고 수군거리면서도 누군가는 문고리에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걸어두고 간다. 낯 뜨거운 질문을 퍼붓던 할머니는 돌아서며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준다. 미워하는 것인지 아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웃들이다.

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은 찌니들을 몰아내려는 마을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다. 20년 전 낯선 땅으로 시집와 이방인으로 살아온 쑤언에게 찌니들의 처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갸들이 사람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벵을 떨어싼대?"라고 쏘아붙이는 그의 거침없는 언변은 마을에 활기를 더한다.

소설은 무거운 사회 문제를 정색하고 설명하는 대신 웃음으로 풀어낸다. 찌니들의 서울 친구 기희가 반려 닭 '삐돌이'와 '순이'를 데리고 마을에 나타나면서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닭을 자식처럼 여기는 도시 여성과 닭을 가축으로만 생각해온 시골 노인들의 충돌이다. "우리 애가 지렁이를 먹어요!"라는 기희의 비명에 장씨댁은 "달구새끼가 지렁이를 묵제 글먼 지렁이가 달구새끼를 묵겄소?"라고 태연하게 답한다. 저자의 생생한 남도 입말도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황석영 소설가는 이 작품을 '해학적 마당극 같은 소설'이라고 평했다.

기사 관련 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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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웃음 뒤에는 묵직한 질문이 남는다. 찌니들을 가장 격렬하게 배척했던 윤 선생이 정작 자신이 벼랑 끝에 몰리는 순간을 맞게 되면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미워하지 않게 돼서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해서도 아니다. 그저 한동네에서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갈등을 아름다운 화해로 봉합하지 않는 데 있다. 수평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무례하고 제멋대로이며 찌니들의 삶을 자기 기준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아프면 밥을 챙기고 곤경에 빠지면 손을 내민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일상은 구체'라고 말한다. 외국인 며느리든 레즈비언이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대단히 선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함께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시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관념도 함께 먹고 일하고 살아가는 구체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믿음이다.

이번 작품은 편견 너머 낯선 이웃의 얼굴을 바라보게 한다. 첫 장부터 한바탕 웃게 만들고 끝내 사람이 사람을 버리지 않는 마음 앞에서 독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이야기다. 232쪽, 1만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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