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중심을 지킨 대구읍성,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대구의 옛 이름은 '달구벌'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통일신라의 새로운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했다. 비록 천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는 대구가 오래전부터 영남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기반을 갖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고려를 거치며 대구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다. 조선시대에는 대구군과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어 영남의 행정·군사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대구의 군사적·행정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조정은 1590년(선조 23년) 임진왜란에 대비해 대구읍성을 쌓았다. 하지만 토성으로 축조된 대구읍성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대구읍성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36년(영조 12년)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는 무너진 토성을 돌로 다시 쌓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후 1870년(고종 7년) 경상감사 김세호는 성곽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동장대(정해루), 서장대(주승루), 남장대(선은루), 북장대(망경루)를 세워 영남의 중심 성곽으로 완성하였다. 그렇게 되살아난 대구읍성은 대구의 중심을 지키며 시민들의 삶과 함께했다.
20세기 초, 대구읍성은 또 한 번의 비극을 맞았다. 1903년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일본인 거주자와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거류지와 상권을 넓히는 데 읍성이 걸림돌이 된다며 철거를 거세게 요구했다. 당시 고종은 철거를 불허했지만,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은 고종의 뜻을 거스르고 대구읍성을 철거하였다.
하지만 읍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철거된 성벽 자리에는 지금의 동성로·남성로·서성로·북성로가 만들어졌고, 이어 1909년에는 성안에 십자 형태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대구 도심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앙로와 동서로 이어지는 국채보상로는 당시 성안에 개설된 십자 도로의 흔적이다.
또한 철거된 읍성의 돌들은 민간에 1전이라는 헐값에 팔려 나갔다. 일부는 계성학교 아담스관과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의 기초석으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서문시장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는 과정에도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문시장 터는 원래 천황당지라는 큰 연못이었는데, 1920년대에 이를 메워 지금의 자리가 되었다. 흩어진 읍성의 돌들 하나하나에는 대구읍성이 품어온 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우리는 사라진 역사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구읍성을 대구의 미래 자산으로 되살리는 길을 고민해야 한다. 세계에는 성곽이 남아 있는 도시가 많지만, 대구처럼 인구 230만이 넘는 대도시 도심 한복판에 읍성의 흔적과 근대문화, 오늘의 도시가 함께 살아 숨 쉬는 곳은 드물다. 대구읍성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광객이 찾고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청라언덕, 경상감영, 진골목, 팔공산, 달성토성 등 다양한 역사·문화·관광 자원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면, 대구는 국내외 관광객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더하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대구읍성 복원은 과거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대구의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